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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희 Aug 08. 2019

첫 여성 무장 독립운동가
남자현 의사

조선의 처음 여성 이야기 NO.4

하얀 국화꽃이 가득했던 그날, 

그곳으로 자현은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남정헌의 딸로 태어나 남정헌의 딸로 살다가 김영주의 아내가 되던 날이었다. 


'남자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었던 조선의 여성으로 태어나 

아무개의 딸로 불리다가 아무개의 아내로, 며느리로, 그리고 아무개의 엄마로 살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여성으로 태어난 자현은 19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제자였던 안동 김 씨 집안에 시집을 갔다.

김영주의 아내로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자현은 결혼 후에도 아버지 남정헌과 남편 김영주와 함께 의병들을 도우며 의병항쟁을 뒷바라지했다. 

을미의병 때 남편을 일본에 잃은 자현은 임신 중이었다. 

남편에게 아이가 생긴 것을 알리기도 전에 남편을 일본의 적군들에게 잃어야 했다. 


자현은 이때 

"나라의 적이 이제는 나의 원수가 되었다. 이제는 저놈들과 하늘을 함께 하지 않겠다."라고 맹세를 하고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었다. 당시 왜적들은 자현을 "조선의 여비장"라고 불렀다. 


남자의 그늘에서 딸로, 아내로, 엄마로 불렸던 자현은 그 껍질을,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수레바퀴 밑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와 우뚝 섰다. 

아내로, 엄마로, 여자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홀로 선 것이다.


자현은 그해(1896년) 12월 유복자 성삼을 낳았다.  자현은 아버지와 의병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여자로서 살아내기 위해 길쌈과 양잠을 해야 했다. 자현이 힘들게 번 돈은 생활비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다. 자현은 아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나라의 독립도 중요했지만 엄마로서의 자신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현은 아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시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아들 성삼이 24세가 되던 해(1919년) 자현은 아들에게 말했다.

"나는 내 한 몸 편하자고 피신을 가는 게 아니다. 절뚝거린 역사를 청산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 잡으며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망명하는 것이다. 나는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기러 간다. 벌판 같은 세상이 내 가슴에 있는데 어느 벌판이 무섭겠는가. 지금까지의 남자현은 잊어라."는 말을 남기고 신촌의 연희전문학교 부근의 교회에서 동지를 만났다. 이때 기독교에 입문하며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받은 자현은  3월 1일 오후에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길로 뛰어들었다.

일제에 대한 만행과 억압을 알리는 그 역사적인 날에 그 자리에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우리가 아는 '유관순'말고도 이름 없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한 명이 바로 '남자현'이다.


3.1 만세 운동이 끝난 후 1919년 3월 9일 새벽에 경성역에서 만난 자현과 아들 성삼은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상인의 행색으로 변장을 하고 만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자현의 나이 47세였다.

자현과 아들 성삼은 석주 이상룡과 일송 김동삼의 배려와 지원으로 무사히 만주에 안착하게 되었다. 이때 길림성 통화현의 한 시골마을에 통나무를 우물 정자의 형태로 쌓아 지붕을 돌이끼로 덮는 '틀방집'을 짓고 벼농사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만주에는 벼농사가 거의 없었으며, 농지를 얻기 어려워 화전을 개간해야 했다.

어렵게 시작한 만주에서도 그녀는 닭을 키우고, 농사를 짓고, 일송 김동삼의 산속에 있는 백서농장에서 일까지 했다. 백서 농장은 독립운동을 하는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농사를 짓고, 수익은 군자금으로 쓰는 둔전이었다.

만주에서의 삶은 언제 어디서는 죽음과 폭력이 덤벼들지 모르는 불안한 삶이었다. 

그리고 자현은 길림성의 동북쪽의 흑룡강성에 가까운 액목현으로 옮겼다. 이때 청산리 전투에서 쫓기던 독립군 10여 명이 자현의 집으로 우연히 숨어들었다. 

독립군이라고 해봐야 자현의 아들 뻘이었다. 

자현의 의병의로서의 경험과 지혜로 마을 이구장을 설득해 독립군을 숨기고 돌보았다. 동상에 걸려있던 그들을 냉방에 있게 하고, 차가운 물을 반쯤 채운 독에 들어갔다 나오게 하여 자현은 아들을 씻기듯 온몸을 부드럽게 닦고 안마를 해주었다. 그리고 따뜻한 방으로 옮겨 음식을 대접했다. 따뜻한 배려와 보살핌에 어린 병사들은 눈물을 흘렸다.

이날 이후 자현은 "어머니"라고 불리워졌다. 또한 당시 독립군에겐 귀했던 말을 가지고 중국 마적단에 가버린 독립군이 생기자 마적단 두목과 담판을 벌여 말과 병사를 돌려받고 더불어 기관총과 탄약을 나누어 쓰게 했다.


액목현에서 자현은 많은 일을 했지만, 그녀가 집중한 것은 교육이었다. 1921년 액목, 화전, 반석에 20개가 넘는 여성 교육기관을 세웠고, 북만주 12곳에는 교회를 세웠다. 그녀는 독립정신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독립정신을 굳건히 하는 데에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현은 여성도 한 독립투쟁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여의군'이 제대로 육성되어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현의 아들 김성삼도 신흥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자현과 아버지 김영주의 듯을 이어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 무렵 만주 사회에 "남자현"이라는 이름을 더욱 각인시킨 것은 "단지혈서" 사건이다.

자현이 죽기 전에 세 번의 단지(손가락을 자르는 것)로 인해 7개의 손가락만이 남아 있었다.

첫 번째 단지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단과 독립단체들의 반목 때문이었다. 서로 간의 미묘한 입장 차이와 알력으로 유혈 전까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자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항일 독립운동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역만리 만주에 와서까지 당파와 파벌 싸움을 하는 독립운동 단체들과 군정들을 향해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서 힘을 합쳐 나라를 되찾는데 한마음으로 함께 하기를 외쳤다. 남의 나라 만주에서까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큰 일, 나라를 되찾는 것인데 작은 입장 차이 때문에 서로를 적대시하고 의미 없는 피를 흘리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자현은 두 번의 단지와 혈서로 모두를 오열하게 했다. 만주의 조선인들은 자현의 뜻을 기려 '손가락 목비'를 세웠다. 자현의 이 같은 외침에 한때 독립 진영의 단결 운동이 벌어졌으나, 사회주의 유입까지 더해지면서 창조파, 개조파, 고수파로의 분열과 함께 힘겨루기와 반목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세 번째의 단지는 1932년 9월 19일 국제연맹 조사단 리턴 경이 만주국을 조사하기 위해 하얼빈에 왔을 때였다. 자현은 일제의 폭정과 조선의 독립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좌우 인사들에게 "내가 몸소 리턴경을 만나 일본이 위만국을 세운 흑막을 폭로하겠다."라고 말하고, 자신의 왼손 무명지 두 마지를 잘라 흰 손수건에 "조선독립원"이라고 혈서를 쓰고 단지한 손가락, 그리고 여성들의 독립운동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함께 넣었으나 불행히도 결국 전달되지 못했다.


만주에 온 지 7년, 1927년 4월 53세의 자현의 왼손에는 2개의 손가락만이 남아 있었다. 

자현은 만주를 떠나며 아들 성삼에게

"아들아. 나는 오늘 다시 조선에 들어가는데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라가 없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진배없으니 나의 죽음을 슬퍼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 나라의 혼을 말살하는 사이토의 목숨을 끊어 조선을 부흥시키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요 시대가 원하는 책무다.  나는 이미 많이 살았으니 죽는 것이 원통할 리도 없다. 다만,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반드시 이 일을 해내야 하리라. 너는 이 어미가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라. 나는 너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딸이기도 하다. 내가 죽더라도 고아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거라."라고 말하고 경성으로 떠났다.

사이토는 식민지 통치 방식을 '무단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헌병'을 '경찰'로 이름만 바꾸어 병력을 증강하고 많은 지식인들을 변절하게 했다.

 사이토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 이후 조선 총독으로 취임했다.

 "먼저 조선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라. 민족혼과 문화를 잃게 하고, 조선인의 조상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가르침으로서  조선 청년들이 부조를 멸시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고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된다.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문화를 교육하면 동화의 효과가 클 것이다. 이것이 조선인들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라며 조선을 말살하기 위해 더 치밀하고 지독한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사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53세의 자현은 박청산, 이천수와 함께 경성 혜화동 28번지 고모씨의 집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송학선이란 청년이 먼저 사이토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로 인해 더욱 강화된 경호와 대대적인 색출 과정에서 동료들이 체포되면서 자현이 머물던 집과 교회에까지 수색이 시작되자 몸을 숨겨야 했다. 

쏟아지는 봄의 빗줄기 속에 자현의 눈물도 섞여 들었다. 

자현은 살아 돌아가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자현이 61세이던 그해, 1933년 3월 1일 위만주국 건립 기념일에 재만주 일본 전권대사 부토요부노시를 격살하는 것으로 원수를 갚으려 했다. 

계획을 앞두고 삼십여 년 전 죽은 남편의 옷을 몸에 감고 중국 거지 노파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하얼빈에 갔던 자현은 무기와 작은 수탄을 지니고 하얼빈 교외 정양가를 지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일제는 60이 넘은 여자의 몸으로 암살 계획을 실행하려던 이 사건을 신문에 게재하지 못하게 막았다. 3개월 여를 지나 게재 금지 제재가 해제되어 동아일보가 1933년 6월 11일 자 2면에 다음의 기사를 실어 자현의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자기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몸에 폭탄을 품고 무등 전권을 암살하고자 하다가 바로 계획 실행의 전날인 지난 이월 이십구일에 합이빈 영사관 경찰에 붓들린 금년 육십 한 살 나는 노파 남자현에 관한 암살 미수 사건은 그동안 기사 게재 금지 중이든 바 지남 7일에 해금되었다.

남자현이라는 노파는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에 OO운동가인 자기 남편이 일본인의 손에 죽은 것에 한을 품고 원수를 갚는다고 하여 여자의 몸으로 전후 10년 동안을 두고 조선과 만주를 걸쳐 드나들며 OO운동에 종사하던 중 소화 2년 4월에는 경성에서 재등 총독을 암살코자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후에 만주로 건너가 합이빈을 근거로 하고 활동 중에 금년 봄에는 무등 전권의 암살을 계획하고 폭탄과 권총을 손에 넣게 된 후 눅은 남편의 의복을 몸에 감고 단신으로 신경에 잠입하여 3월 초하룻날을 기하여 무등 전권을 암살하고자 지난 이십구일에 합이빈을 출발코자 할 즘에 합이빈 영사 경찰의 손에 붓들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때 체포된 자현은 다섯 달 하고도 일주일 동안 잔혹한 고문과 혹형의 심문에 시달렸다.

그리고 8월 6일까지 11일간 단식으로 항거했다. 


일제가 식사를 넣자 자현은 소리쳤다.


"이제 너희가 주는 밥은 먹지 않는다. 

너희가 감히 나를 살리고 있으니 내가 스스로 죽어 너희들을 이겨야겠다. 

조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 죽음은 끝이 아니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너희는 사는 것이 죽는 것이요, 나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자현이 단식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자 일본은 병보석으로 8월 17일에 그녀를 풀어 주었다. 인근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진 자현은 아들 성삼과 손자 시련이 오자 "이제는 됐다."라고 하며 자신을 조선의 여관으로 옮겨 달라고 했다.


하얼빈 지단가에 있는 조 씨의 여관으로 옮겨진 그날 여관은 독립운동을 함께 해오던 여러 군정의 동료들로 채워졌다. 자현은 아들 성삼에게 감춰둔 자신의 행낭을 가져오라고 해서 249원 80전을 꺼냈다. 200원은 조선이 독립되는 날 축하금으로 바쳐달라고 부탁했고, 49원 80전의 절반은 손자 시련의 교육비로, 나머지 절반은 친정 조카의 교육비로 남겼다. 


주변에서 식사를 권하자 자현은

"사람이 먹고사는 것은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달려 있다."

말로 대신했다.


자현은 다시 혼수상태가 되었고, 8월 22일 숨을 거뒀다. 

아니 일본과 싸워 이겼다.

그녀가 선택한 단식은 그녀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었고, 그녀만의 싸움이었다.


국내 신문은 그제서야 '부토 모살 범'이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순국을 알렸다.

그해 8월 27일 자 조선중앙일보의 보도이다.

"30년 만주를 무대로 조선 OO운동에 종사하던 남자현은(여자) 당지 감옥에 구금 중이던 바, 단식 9일 만인(11일인데 2일이 줄어있다) 지난 17일에 보석 출옥하였는데, 연일 단식을 계속한 결과 22일 상오 12시 반격에 당지 조선려관에서 영면하였다."


자현이 순국한 뒤에도 자현의 장례식을 계기로 조선인들이 결집하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의 강압으로 그녀의 장례는 하루 만에 끝났다. 아들 성삼이 부고장을 인쇄하여 돌리자 일제는 그것마저도 압수했다.


남자현의 장례식도, 

무덤도 사라졌지만, 

자현의 절절한 유언만은 다 이루어졌다.

교육비로 남긴 49원 80 전도 교육비로 쓰였고, 

독립축하금이었던 200원은 

해방 후 1946년 3월 1일 3.1 잘 기념식에 김구, 이승만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조영인이 전달하였다.


여성이 천대받던,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이름 없는 수많은 여성들이 넘쳐나고

이름이 있더라도 아무개의 딸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야 했던 시대를 살았던 자현은 

그 굴레를 깨고 스스로 분연히 일어섰고, 죽는 날까지 독립운동가로 살았다. 

"혁명의 어머니", "전율할 노파"로 불렸던 남자현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 되었다.

여성 항일 운동가로는 최고의 서훈이었다.









자현은 자신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의 문사가 남긴 "여래남자현선생전"이라는 제목으로 <진광> 중국어본 제1권 11~13쪽에 약전이 게재되었다. 또한 광복 5년 뒤인 1950년 4월에 간행된 <화도독립혈사> 제2권 121~127쪽에 남자현의사의 약전과 추모 헌사와 사진 5점들이 있다.

그리고 아들 김성삼의 회고 <나의 생애(1975)>와 일제의 기록들과 신문기사로 그녀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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