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폭탄을 안고 일본으로 날아가리라"
1917년 5월 한양에서 미국의 곡예비행사인 아트 스미스(A.Smith)의 곡예비행이 있었다. 많은 조선인들에게 근대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고, 젊은이들에게는 푸르른 하늘에 대해 동경과 이상을 가지게 했던 비행이다. 기옥은 이날 "일본으로 폭탄을 몰고 가 천황이 사는 황거를 폭파하겠다."라는 마음을 먹었다.
19살 적 3.1 운동 때 내 목숨은 이미 나라에 바쳤다. 이후는 덤으로 사는 삶이었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가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던 갈례는
첫째에 이어 또다시 딸이 태어나자 기옥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갈례'는 권기옥의 어릴 적 이름이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이름이 없는 여성도 많았고, 이름이 있더라도 아들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염원과 딸로 태어난 아이에 대한 서러움을 담긴 이름이 대부분이었다.
기옥은 11살이 되던 해부터 은단 공장에 다니며 집안 살림을 도와야 했다.
그런 기옥에게 기회가 왔다.
12살이 되던 해 장대현교회에서 운영하던 숭현 소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숭현소학교를 졸업한 기옥은 기독교 학교인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했고, 졸업반이던 그 해 3.1 만세운동에 가담하게 되면서 비밀결사이던 '송죽회'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신흥식으로부터 지휘를 받아 1919년 3월 1일 경성부의 만세 시위와 동시에 평양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는 데 참여했다가 구금되었다.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집하고 공채를 팔아 송금하였고 6개월간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봄 출소한 기옥은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평안도와 경상도 지방을 돌며 민중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연락 활동을 했다. 1920년 9월 미국 국회의원 동야 시찰단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임시정부는 대대적인 시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에 폭탄을 던질 독립 단원들을 잠입시키는데, 기옥은 그들을 도왔다. 숭현소학교의 석탄창고를 은신처로 제공하여 폭탄을 제조하도록 도왔고, 8월 3일 거사 현장에 폭탄을 운반하는 일을 도왔으나 일제의 감시에 걸린 기옥은 체포 직전 간신히 탈출했다. 조만식 선생이 보내준 여비로 중국행 멸치잡이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 손정도 의장의 집에 머물며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기옥은 80여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남경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규식 애국지사의 부인 김순애의 소개장을 받아 남경으로 달려갔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항주의 홍도 여자 중학교를 찾아갔으나 서투른 종 국어 실력 때문에 1학년으로 재입학을 했으나, 1학년 수업도 따라가기 어려웠던 기옥은 소학교 1학년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하기로 하고 차근차근 공부를 했다. 기옥은 단숨에 월반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1923년 6월 졸업하고, 상해로 돌아와 인성학교 교사로 5개월간 재직했다.
1917년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꾸어왔던 기옥은 중국의 비행학교에 지원하지만, 서류로는 거절당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기옥은 임시정부 이시영의 추천서와 중국인 혁명가 방성도, 운남 성장 겸 독군 탕자오의 추천서를 들고 윈난 성의 곤명에 도착해 1923년 12월 교장인 당계요를 만나 직접 담판을 지었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당계요 교장은 그녀의 용기에 탄복하여 전격적으로 입학을 허가했다. (1923년 12월 조선인 청년 3명과 운남 육군 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다.)
기옥은 스물세 살이었다.
그녀는 훈련비행 9시간 만에 단독 비행이 허가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1925년 2월 항공학교를 졸업한 기옥은 비행 탑승 적성검사를 통과해 조선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되었다.
비행사가 되어 상해로 돌아왔지만, 임시정부의 재정은 열악했다. 기옥은 계속 비행 연습을 하기 위해 중국의 장제스의 국민혁명군 항공사령부 소속 비행사로 합류했다. 1926년 4월에 난징 국민정부 수립 이후에는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 항원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였던 이상정(시인'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의 형)을 만나 결혼을 하고 함께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즈음 <중외일보>(1927.8.28)에는 다른 재중 조선인 비행가들과 함께 "중국 혁명 전선의 조선인 비행가"로 불렸다. 10여 년을 중국 공군에 복무한 권기옥은 소령에서 중령까지 진급하며 활약을 했다. 그리고 1928년 5월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31년에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이 1932년 상해사변을 일으키자 기옥은 비행기를 몰고 가서 일본군에게 기총소사를 했고, 이 일로 중국 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1936년 하반기에 기옥과 그녀의 남편 이상정은 일본의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고 8개월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때 기옥의 13년간의 비행 경력은 끝났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기옥은 중국의 육군 참모 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영어, 일본어, 일본군 식별법과 성격을 강의하며, 일본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군에 제출하는 정보 수집 업무도 맡았다.
1943년에는 김순애 등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던 최용덕, 손기종과 함께 조선 광복군의 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했으나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전쟁에 패하면서 무산되었다.
1947년 10월 어머니의 사망으로 먼저 귀국했던 남편 이상정이 11월에 뇌일혈로 급사했고, 1949년 기옥은 홀로 귀국했다.
기옥은 귀국 후에도 국회국방위원회의 전문위원이 되었으며, '공군의 머머니'로서 공군 창설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올바른 역사 기록에도 관심을 가졌던 권기옥은 1957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 연감> 발행에 관여했고, 1966년에는 최초의 여성 출판인으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기옥은 정계에도 입문했으나 신익희의 사망 이후로 더 이상 정치를 꿈꾸지 않았다. 1971년에는 중화민국 비행 훈장 공군 일급 상장을 받았다.
기옥은 숨 가쁘게 달려온 자신의 길에서 홀로 남았다.
기옥은 아이를 입양하여 아들로 키웠다.
1975년에는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모두 내 자식이며,
극일 하는 젊은이들을 키워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전재산을 장학사업에 기부했다.
그리고 1988년 4월 19일 85세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꿈을 가지라우!
꿈이 없으면 송장이나 다를 게 없디 않가서!
특히 젊은이들은 꿈이 있어야 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라우.
못할게 뭐 있어."
7000시간의 비행을 기록하며 무공훈장까지 받은 권기옥이었지만, 그녀도 조성의 여성이었다.
한때 '갈례'라 불렸던 독립운동가 기옥은 남편이 있는 집에 돌아오면 조를 먹지 않는 남편을 위래 냄비에 밥을 둘로 갈라지어야 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여성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은 남편을 내조해야만 하는 조선의 여인이었다.
조성의 여인으로 태어나 조선 여인으로서 모든 것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던 기옥,
독립운동가로서의 또 하나의 삶을 살아냈지만 조선의 여인으로서의 삶까지 감당해야 했다.
지금의 우리나라 여성들은 또 다른 조선의 여인으로 살고 있다.
일과 육아와 집안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말이다.
*영화 <청연>의 모델이 되었던 "박경원" 또한 여류비행사였다. 영화 <청연>으로 인해 "권기옥"보다 박경원을 사람들은 더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친일파였고, 역사적인 자료를 조사해보아도 1921년 5월21일자 <동아일보>에서 권기옥을 여류비행사로 소개했는데, 이 기록은 박경원보다 4개월이나 빠르다.
또한 많은 언론에서 권기옥을 최초의 여류비행사라고 보도했으며, 1978년 2월부터 <한국일보>에 연재된 회고록 <나의 이력서>에서는 권기옥을 '동양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