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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희 May 09. 2019

조선 첫 여의사
김점동=김에스더=박에스더

조선의 처음 여성 이야기 NO.2


“내 나이 열 살 적에 아버지는 나를 스크랜튼 부인에게 데려다주셨다. 아주 추운 때였는데 스크랜튼 부인이 나를 스토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전에 스토브라는 것은 본 적이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그 서양 부인이 나를 그 속에 집어넣으려는 줄 알고 겁을 집어 먹었지만 그분의 아름답고 친절한 얼굴을 보고는 나를 불에 집어넣으려는 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당시 학당 에는 나 말고 세 명의 여자 아이가 있었다.”(Ella A. Lewis, 1893; 민숙현‧박해경, 1981: 499-500) 



그 시절 여성은 천한 존재였다. 

많은 여자아이들이 부모에 의해 남의 집에 종이나 첩으로 팔려가던 때였다.

10살의 점동은 가난하면서도 네 번째로 딸을 낳은 아버지가 양자를 들이면서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의 설립 초기에는 공부하겠다고 찾아오는 여성이 없었기에 스크랜턴 부인은 거리에서 고아들을 찾거나 가난한 집을 찾아다니며 학생을 모집해야 했다.

미국 감리회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던 아버지 김홍택은 아펜젤러에게서 이화학당에 입학하면 먹이고 입히고 모든 비용을 부담해준다는 스크랜튼 부인의 방침을 들었다. 가난한 점동의 아버지는 셋째 딸이었던 점동을 입학시키기로 결정했다. 1886년 11월 점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에 입학하면서부터 여성 해외선교회의 밸뷰 옥실러리(The Bellevue Auxiliary)라는 작은 단체로부터 매년 40달러를 지원받았다. 점동은 한글과 한문, 영어와 성경, 산수 등을 배웠다. 기록에 의하면 "2년 전에 셔우드 의사와 벵겔 양이 한국에 오셨다. 로드 와일러 양은 우리에게 지리와 산수를 가르치고, 벵겔양은 과학과 또 다른 지리를 가르쳤고 금년에는 오르간을 가르쳐 주신다. 나는 영어와 오르간을 내 평생 배웠으면 좋겠다. 셔우드 의사는 생리학을 가르치고 주일 공부도 맡으셨다."라고 되어 있다.

점동은 학당에서의 공부 외에도 진료소의 일을 도왔다. 1885년 9월부터 진료를 시작한 이 곳은 1887년 6월 15일 고종으로부터 "시병원"이라는 현판을 사액하여 정부 차원의 지지를 표현했으나 여성 환자들은 병원을 찾지 않았다.(당시 여자들은 낮에 외출을 할 수 없었으며 밤에 종이 울리면 그때서야 밖에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 의사에게는 더더욱이나 진료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1887년 10월 메타 하워드라는 여의사가 처음 도착했고, 그녀는 이화학당 관내에 여성을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였고, 명성황후는 이 병원에 "보구 여관"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메타 하워드는 2년간 3000여 명의 여성 환자를 진료했으나 건강을 잃어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1년 후 로제타 셔우드가 두 번째 여의사로 조선에 왔다. 많은 환자들이 오랫동안 여의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알지 못하는 로제타 셔우드는 도착한 다음날부터 진료를 해야 했다. 학생들 중에 통역과 진료보조가 선발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점동이었다. 처음 진료소 일을 시작하였을 때 점동은 의료보조의 업무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영어 실력 때문에 몇 시간씩 통역을 하며 약을 처방하고 치료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지 5년째인 1891년 1월 25일 김점동은 올링거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골랐다.(그 후 그녀는 김 에스더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6살이 되자 에스더의 어머니는 에스더의 결혼을 걱정하여, 선교사들이 신랑감을 찾아주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남자와 결혼시키겠다고 했다. 그 당시 조선은 조혼이 유행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중매인이 중매할 수 없는 장애인이나 환자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에스더도, 에스더의 어머니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에스더에게 신랑감으로 박유산이라는 사람을 중매했다. 박유산은 윌리엄 홀이 처음 평양에 갔을 때 마부로 같이 갔었고, 윌리엄 홀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했고 선교사업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윌리엄 홀은 하나님을 위해 충실하게 일을 하는 여자와 가족을 위해 음식과 바느질을 잘하는 여자 중 어떤 여자를 아내로 원하는지 박 유산에게 물었다. 박 유산은 그 당시 여자들을 평가하는 사회적 기준인 음식과 바느질을 잘하는 여자보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아내를 원한다고 말했고, 윌리엄 홀은 그 말을 듣고 김 에스더의 남편으로 박유산을 중매했다.

에스더의 어머니는 나이가 많고 한때 떠돌이 노동자였던 박유산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박유산의 아버지가 훈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결혼을 허락했다.


“당신이 어제 보낸 편지를 받고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이제는 여태껏 말하지 않았던 제 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흘 동안 저는 뜬 눈으로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남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느질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습은 누구나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이 점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비록 제가 남자를 싫어해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박씨를 저의 남편으로 삼고자 하시면 저의 어머니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그의 지체가 높고 낮음이 모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고 낮음에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줄 당신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참 묘한 느낌이 듭니다.”(1893년 4월 29일자 로제타 홀의 일기: 닥터 셔우드 홀, 2009: 126-127) 


1893년 5월 24일 박유산과 결혼한 김에스더는 서양의 관습에 따라 남편의 성을 따랐고, "박에스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결혼은 에스더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서양인들처럼 초록 실크 코트를 입고 서양인 의사들은 따라 환자들의 말을 통역하고 진료를 돕는 에스더에게 조선 여인들은 존경을 표했다. 1893년 결혼 후 로제타 셔우드의 언청이 환자의 수술을 보조하고 흉하게 입술이 콧구멍에 붙어 언청이라 놀림받던 아이가 회복되는 모습을 본 점동은 자신도 의사가 하는 일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점동은 이 일을 계기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1894년 11월 24일 청일전쟁 후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 홀이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 1살 된 아들과 임신 7개월째였던 로제타 홀은 자신과 아기들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정했다. 로제타가 귀국을 결심하자 박에스더는 로제타 홀에게 자신도 미국에 가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

로제타는 여성 해외선교회의 허락을 받고 여러 사람에게 경제적 도움을 얻어 박에스더와 박유산을 함께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에스더의 미국행은 여러 사람의 도움과 박유산의 이해와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박유산은 아내 에스더가 서양인 의사들과 나란히 진료하려면 정식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아내의 미국행을 도왔다.(정규 미국 유학생은 1883년 보빙사 수행원으로 도미해 2년간 수행한 유길준이 시작이었다.)


1894년 12월 16일, 17살의 박에스더는 남편과 로제타 홀과 함께 미국으로 출발했고, 1895년 1월 뉴욕에 도착한 박에스더는 로제타 홀의 주선으로 1895년 2월 1일 뉴욕 리버티 공립학교에 편입하여 미국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그해 9월에는 뉴욕의 유아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한편  윌버그 부인에게 라틴어, 물리학, 수학을 개인교습을 받으며 의과대학 입시 준비를 했다. 임신 중이었던 에스더는 1896년 2월 21일 딸을 출산했는데 미국에 도착한 지 1년 2개월째, 스무 살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려웠지만, 남편 박유산은 뉴욕 리버티의 셔우드가의 농장에서 일하며 수입의 대부분을 아내인 에스더에게 보냈다.

1896년 10월 1일 박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대학교(Wome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했다. 신입생 300명 가운데 최연소였고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현실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태어난 지 갓 1년이 지난 아기는 폐렴으로 뉴욕의 유아 병원에서 10일 동안 앓다가 엄마의 품을 떠났다. 1897년 3월 15일이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박유산도, 박에스더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1897년 11월 10일 로제타 홀은 다시 선교사로 한국으로 돌아갔고, 박유산은 뉴욕의 식당으로 옮겨 일을 하며 아내의 공부를 도왔다. 후원자였던 로제타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어냈다. 그리고 로제타가 돌아간 지 2년 후 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은 폐결핵으로 입원했다. 선교회의 기부금이 있었지만, 에스더는 부족한 생활비와 학비, 박 유산의 병원비까지 벌어야 했고 밤에는 남편의 병간호를 해야 했다. 박에스더는 모든 것을 견디어 내며 공부를 계속했지만 졸업 시험 3주 전 1900년 4월 28일 남편 박 유산을 폐결핵으로 잃었다. 딸과 남편을 잃은 에스더는 큰 슬픔과 상실감 속에서 졸업 시험을 마쳤고, 미국에서 의사로서 활동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녀는 남편과 딸을 그곳에 묻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1894년 "조선"을 떠났던 박에스더는 1900년 11월 "대한제국"으로 귀국한 박에스더는 평양에 있던 로제타와 함께 "조수"가 아닌 "의사"로서 함께 의료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여성들의 삶과 고통 역시 조선 여성들의 삶과 다름이 없었기에 에스더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환자를 돌보았다. 귀국 후 10개월간 그녀가 진료한 환자 수만 3000명이었다.


“매년 거의 변화가 없기에 나의 보고서는 매우 짧다. 휴식을 위해 진료소는 7월을 제외하고는 일 년 내내 일한다. 그러나 그때도 환자들은 매일 내 집으로 와서 약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보낼 수 없다. 1년 동안 130명 방문치료, 진료소에서 1,230명 새 진료와 2,017명 재진료 등 3,377명을 진료하였다. 내 진료 시간 외에 그리고 일요일의 응급 진료가 꽤 많은데 기록에 포함하지 않았다. 나는 더 많이 진료하고 싶다. 충실한 전도부인 데레사와 나의 두 조력자인 배시와 그라체는 의료활동을 하는데 수없이 많은 곤란한 상황에 내 옆에 있었고, 그들의 의무에 충실하였다. 지난해는 콜레라에 특별히 노력하였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출입문에 있는 고양이 그림에 의 해 콜레라가 지나가기를 많은 사람들이 희망했다. 콜레라는 ‘쥐의 질병’으로 알려져, 고양이는 쥐보다 강한 동물이고 쥐의 적이기 때문이다. 고양이 그림이 질병을 막아주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죽음을 공포스러워했고, 그리스도교인처럼 미래에 대한 밝은 빛이 없다.”(Esther K. Pak, 1903.5, “Chong Dong Dispensary, seoul”, 13-14) 


에스더는 귀국 이듬해인 1901년에는 보구여관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했고, 치료와 함께 위생 강의도 했다. 질병은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한데 잘못된 민간요법과 무속신앙으로 인해 조선 여성들은 건강과 위생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더는 미신적인 방법으로 치료를 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을 계몽했고, 지나친 과로로 진료를 못하고 쉬어야 했던 때도 있었으나, 진료시간 외에도 집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거절하지 않고 돌보았다. 에스더는 계속되는 과로로 아프기 시작했고, 끝내 진료를 그만 두어야 했다.

 박에스더는 폐결핵으로 1910년 4월 13일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조선을 떠나 대한제국으로 귀국한 지 10년 만이었다.


짧은 생이었지만,

어떤 길보다도 어려운 길을 훌륭히 갔으며, 

많은 사람을 구한

에스더는 

원하던 대로 아름다운 일을 했다.



아름다운 일을 하기를 원했던 

김점동, 김 에스더, 박에스더,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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