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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희 Jan 19. 2016

하란사 그리고 김활란
조선의 처음 여성 이야기 NO.1

하란사는 1875년(고종 12) 평안남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여자는 이름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인천 별감으로 있던 하상기(河相驥)와 혼인한 후 그녀는 남편의 성을 따라 하씨 부인이라 불렸다. 


1886년 5월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가 정동의 작은 한옥집에서  한 명의 여학생으로 수업을 시작했고, 이듬해 1887년 2월 고종 황제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름 조차 가질 수 없었던 조선의 여인들이 규방을 나와 스스로를 찾기 시작했던 그때,

처음으로 한국 여성 최초의 문학사(B.A) 학위를 받으면서 미국 오하이오의 웨슬리언(Wesleyan) 대학을 졸업한 "하란사"란 여인이 있었다. 하란사는 한국 여성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었고, 조선의 엘리트 국비 유학생들과 함께 게이오 의숙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한국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녀는 당시의 금수저라 할 수 있는 친일파의 자녀도 아니었고, 오히려 어린 나이에 하상기의 후처로 들어가서 '하씨 부인'이라 불리던 기혼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을 바꾸었다. 누군가의 아내인 '하씨 부인'의 삶을 벗어나 스스로의 가능성을 향해 용감하게 도전했다. 그녀가 한 첫 번째 일은 이화학당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출발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이화학당이 여성을 위한 신교육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하란사가 입학을 신청했지만 기혼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입학을 거절당했다. 하란사는 학교의 거절에 포기하지 않았고,  어느 날 밤 학당장이었던 룰루 프라이(1868-1921)를 찾아갔다.(당시 조선의 여인들은, 특히 양반가의 여인들은 새벽과 밤늦게만 외출할 수 있었다)

또다시 몇 차례의 거절 끝에 하란사는 갑자기 하인이 들고 있던 불을 불어 꺼버렸다.


"나의 인생이 이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 있습니다. 나에게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주시겠습니까?"

라고 간곡하게 청했다.


결국 프라이 교장은 그녀의 입학을 허가했고, 하란사는 1894년을 전후로 1년여간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양반 여성들도 이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기에 하씨 부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공부하는 동안 신앙을 갖게 되었고,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그리고 이를 한자로 바꿔 란사(蘭史)라 했다.


하란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에 딸을 낳았는데, 남편의 전처의 아들 하구룡의 아내인, 즉 며느리에게 아기를 맡기고 학업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인 하상기는 저녁 시간이 지나면 하녀에게 마님의 진지를 가져다 드리라 하여 하녀가 소반에 식사를 담아 학교까지 날라다 주었을 정도로 지극 정성이었다.  하상기의 정성 어린 외조는 이화학당의 졸업 후 하란사가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왔고, 일본에서의 공부를 마친 후 1900년 미국 웨슬리안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했다. 하란사와 하상기는 일반 평민이나 천민보다 훨씬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박에스더나 오긍선과는 다르게 자비로 유학을 갈 수 있었지만, 남아있는 자료들로 볼 때 어렵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씨 부인이 룰루 프라이 교장을 찾아갔던 그 밤 이후로 10여 년이 지난 1906년, 하란사는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귀국 후 궁중에 자주 드나들며 엄비(고종의 비 순헌황귀비)에게 “사숙을 폐지하고 근대적인 학교를 많이 세워야 한다”권하였고, 엄비가 숙명여학교와 진명여학교를 창설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녀는 메리 스크랜튼 여선교사와 함께 달성이궁(達城離宮)에 거주하며 상동 예배당에서 여성들에게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다. 또 학생들의 어머니들로 자모회를 구성하고 가정의학을 가르치는 등 여성의 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이 학교는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후에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되었다가 남자 협성 신학교와 합동하여 오늘의 <감리교 신학대학>이 되었다. 


앨벗슨 교장은 '학생들이 하란사와 열네 차례 시골로 나가 전도행사를 가졌고, 9개의 교회를 돌며 예배를 드렸고 1,426회 가정방문을 했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단순한 교사로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거리에 나가 전도하는 전도자였다. 그 후 이화학당의 기숙사 사감으로 부임한 하란사는 호랑이 사감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학생들의 건강을 늘 걱정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화 학생의 자치모임인 이문회도 이끌었는데 바로 "유관순 열사"가 이문회 출신이었다.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부가 생긴 뒤, 1911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부임하여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으나, 1915년 이화 고등 보통학교 졸업반이었던 딸 자옥을 갑자기 잃게 되었다. 유일한 딸을 잃고 슬픔에 빠졌던 하란사는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로 이듬해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하면서 미주지역  순회강연을 하고 모금한 돈으로 1918년 정동 제일교회에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 오르갠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후 하란사는 미국을 오가며 조선의 처지를 미국 등 각 나라와 각계에 알리는 등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썼다. 고종과 엄비는 하란사에게 궁중의 예물을 군자금으로 쓰라고 내어 줄 정도로 그녀를 신임했다.


그리고 1919년 고종은 파리 강화회담에 한일의정서 등 굴욕적인 외교문서를 보내 일제의 만행과 조선의 상황을 알리려는 계획을 세우고, 의친왕과 친분이 있던 하란사를 불러 밀지를 전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고종이 승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하란사는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만찬장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쓰러지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바로 숨을 거두게 된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온 선교사 벡커(A.L.Becker)는 그녀의 시체가 검게 변해 있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스파이였던 배정자가 일본의 사주를 받아 하란사를 독살하였다는 등의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타국에서 죽은 힘없는 나라 조선의 여인 "하란사"의 죽음을 밝혀 줄 사람은 없었고, 소문만 남았다.


갑작스러운 고종의 죽음은 많은 의심을 남겼고, 후에 이어진 하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 또한 의문을 남겼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5년 하란사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 되지만, 슬프게도 받을 가족이 없었다.


고종의 승하에 이은 하란사의 의문스러운 죽음,  

받을 유족이 없는 훈장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김활란의 동상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며,

김활란을 기념해 헬렌관이라 명명한 이름은 정말 얼굴을 들 수 없게 한다.


하란사와 김활란!!


너무나 비교되는 삶을 산 이 두 여성은 역사에 남아있지만, 우리는 하란사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

어떤 사람은 기생 출신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평양 출신이라고도 하는 기록의 진위도 가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하란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김활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2015년에도 이화여대에 있는 김활란의 동상에 포스트 잇을 붙이는 플래시몹이 있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연합뉴스에 따르면

학생인 K씨가 '김활란 동상 철거 요구 포스트잇 붙이기'라는  익명의 글을 올렸고, 300여 명의 학생들이 철거를 요구하는 포스트 잇을 붙였다. 이 포스트 잇은 저녁 6시경 "제거"되었다.

한다.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는 임시공휴일까지 지정했다.


우리는 늘 일본에 사과를 요구해왔으나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김활란이 

신여성으로서

친일과 항일의 경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여자의 몸으로 살아내기 어려운 시대였다고 이해하려고 해도

"우리나라  최초"의 고등교육을 받은, 

배운 여성으로서, 가르치는 자로서  

한 어머니로서

어린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같은 여자로서

많은 조선 여성들

종군위안부로 내보내는 것을 독려한 김활란을 

우리는 동상까지 세워 추모하고 있다.



우리는 정말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가 김활란의 업적을 동상까지 세워 추모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일본의 사과를 요구할 수 있을까?


생명 없는 쇳덩어리 하나 철거하지 못하는 우리는 정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인가?


우리는 피로 얼룩진 우리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걸까?


우리가 어떻게 위안부 할머니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2015년처럼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임시공휴일을 지정할 것이 아니라


"경술국치"를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고 


잊지 않고 전해야 한다.


또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친일파 김활란의 친일행적 

http://cafe.naver.com/01033258637/3817



경술 국치일  :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영구히 가진다"를 첫 번째로 한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합니다.  나라를 잃은 치욕을 겪은 그 날 '경술국치' 이후, 조선은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민족의 치욕이지만 절대로 잊지 않아야 하는 날이 바로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입니다


http://good.edunet4u.net/classMovie/common/swf/player/edunet/GoodEdunetPlayer.swf?mode=service&accessJS=false&cid=249421&autoPlay=false&height=393&cid=249421&url=http://good.edunet4u.net/classMovie/common/swf/player/edunet/GoodEdunetPlayer.swf&width=700&startTime=0&mode=service&volume=40&endTime=0&accessJS=true


+++이 글은 하란사에 대해 "김성은"님이 발표한  <신여성 하란사의 해외유학과 사회활동>이라는 논문을 기준으로 연도를 기록했습니다.


++하란사와 유관순 열사 등 자료를 볼 수 있는 곳 

1) 국립여성사전시관 : 동작구 대방동 345-1 서울여성프라자 2층 (1호선 대방역 3번 출구)

2)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 서울 중구 정동길 76  



정동 이화박물관(심슨 기념관)에 있는 하란사에 관한 안내판의 글이다.
-배움의 열망 가득한 기혼 학생-
  하란사는 최초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최초로 미국에 유학한 한국 여성 유학생이며 처음으로 미국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을 하였고 이화여대의 최초 한국인 교수가 되기도 하였으며 한국 여성의 복장도 변화시킨 신여성 패션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도 한다.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에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전도사로 미국 감리교 총회에 참석하여 강연을 하고 국내의 각 교회를 다니며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활동으로 교인도 늘리기까지 하였다. 전도사로서는 9개 교회에 다니며 예배에 참석을 하고 교인들의 집 1,426호를 심방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화학당 학생자치모임을 통하여 성경 그리고 독립정신을 학생들에게 갖게 하여 하란사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19년 3.1 운동 때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여 그 당시 이문회 회원이었던 유관순도 나오게 된 기폭제 역할을 하란사가 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의 각 지역교회를 다니며  후원받은 금액으로 각 교회를 돕고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갠까지 구입하여 교회에 기증을 하기도 한 교육가, 사역자, 독립운동가 등 많은 일을 한 100여 년 전 한국 최고의 여성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유해 주세요...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전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예전에 썼다가 서랍에 넣어뒀던 글을 다시 수정하여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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