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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희 Feb 09. 2017

NO. 2  암호명 여우사냥 그리고 재와 뼈

조선에 남은 것 중 가장 나쁜 것은 일본이었다-두 번째

NO. 2  암호명 여우 그리고 재와 뼈


일본이 너무 충실하게 조선의 내정개혁에 착수했기에 민비는 도리어 그러한 간섭을 싫어하였다.(중략) ------암살에 참여했던 고바야가와 히데오의 회고록 중에서


한때 조선의 도성 안에는 양인들이 어린아이들을 몰래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소문의 발단은 "사진"이었다. 서울에 사진소가 처음 문을 연 것은 1883년이었으나, 사진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1883년 미국 공사관의 서기가 서울 주변에서 촬영한 조선 아이들의 사진의 일부가 도둑맞았다. 그리고 며칠 뒤 얼마 전 행방불명되었더 아이가 잔혹하게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었다. 다시 며칠 뒤 사진이 찍힌 아이 중 한 아이가 시신이 되어 나타났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조선인들은 서양인들을 의심했다. 특히 선교사들이 갓난아이들을 납치해 죽이고 물에 끓이고 이들의 눈을 빼서 밀가루에 넣고 갈아 약을 만든다는 끔찍한 소문이 돌았다. 선교사들은 당시 서울에 젖소가 없음에도 매일 우유를 먹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여자아이를 납치해 가슴을 절단하고 우유를 만들고 있다는 오해까지 받았다.


사실 그들이 마신 건 깡통 우유였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서 조선 사람들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잡아먹기 위해 살찌우고 있다고 의심했고, 미국 공사가 '구운 아기를 식탁에 올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당시 워싱턴에 있던 알렌은 조선의 가난한 아버지들이 일본인이나 중국인에게 아이들을 파는 것 때문에 오해가 생겼을 거라고 말했다. 미국 공사는 폭동이 일어날까 염려해 제물포에 정박 중인 에섹스호에 해병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처음에 동의하지 않았던 에섹스호의 함장은 결국 28명의 해병을 파견했다. 그들은 제물포에서부터 12시간을 걸어서야 도착했다.

결국 고종이 서양인은 여인의 가슴을 도려내지 않으며, 아이들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포고령을 내리고서야 사태는 진정이 되었다.

 후일 미국 공사관의 서기는 배후의 인물로 대원군을 지목했다. 대원군이 외국인에 대한 증오감을 불러일으키고 혼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려고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러한 일을 벌였다고 말이다. 또한 위안스카이까지도 대원군의 정치 공작이었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보면 우리는 어느 정도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흉흉한 소문이 가라앉은 뒤에도 조선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낯선 존재였던 "양인들"은 1895년 여름의 숨 막히는 더위와 함께 맹렬한 기세로 사람들을 쓰러트렸던 콜레라가 지나간 후 '조선인의 친구'가 되었다. 모두가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는 '백정'들까지 스스로의 몸을 아끼지 않고 치료하는 선교사들의 모습은 "양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버리게 했다.


그리고 조선의 백성들은 조선인의 "친구"인 선교사들이 전하는 "위대하신 의사(The Great Physician)"가 누군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과 동학에 이어 온 콜레라로 서울에 모여 있던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지로 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으며, 남장로교도 '7인의 선발대'에 뒤이어 선교사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또한 북장로교와 감리교외에도 '매켄지'선교사의 죽음으로 "조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캐나다에서도 선교사들이 파송되고 있었으며, 부산으로 출발했던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의 헌신적인 조선 선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전킨과 테이트, 레이놀즈 등의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은 전주에 첫 선교부를 열 준비를 마치고, 테이트 선교사는 선교부가 매입한 부지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자전거로 전주를 왕복하며 집을 짓는 것을 도왔다.(기록에 의하면 자전거로 서울에서 전주로 가는 데에 이틀이 걸렸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서소문의 전킨 선교사의 집에서 모이던 신자들 가운데 세례교인도 생겼으며 언더우드 선교사는 교회를 건축했고, 고종의 허락 아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시작되었다.

선교사들도 기록한 것처럼 조선인들은 선교사들을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밤, 궁에서 총성이 울렸다.

불길했다.

모두들 불안에 떨었다.


궁에서 불길이 일고 연기가 피어 올랐다..

궁궐 근처에 살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은 불안한 마음으로 소식을 기다리며 새벽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에 세상이 바뀌었음을, 고종의 왕비가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공사와 대원군의 밀약 아래 한밤중 궁궐을 침입한 일본의 무뢰배들은 왕자와 왕을 모욕하고 왕비를 찾기 위해 시녀들과 내관들을 죽였다.

그리고 기어코 찾아낸 왕비를 무참히 살해하고 그 시신조차 태웠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왕비는 빈으로 강등하고, 하루라도 비울 수 없는 국모의 자리를 위해 간택령을 내린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고종과 왕자는 겁에 질렸다.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고종에게 궁궐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고종은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자신과 함께 있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있으면 일본도, 대원군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고종은 선교사들이 총을 들고 지키는 문 안에서 선교사들의 부인이 직접 싼 도시락과 선교사들이 가져온 통조림만을 먹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독살에 대한 극한의 두려움은 몰락해가는 조선이라는 배에 타고 있던 고종을 오로지 낯선 타인인 파란 눈의 선교사들만을 믿게 만들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너무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어 기쁩니다.

그동안 구독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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