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내 수습기간도 끝나고 입사한지 8개월차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참 별 거 안한 것 같지만 돌아보면 배운 것도 많고 나 자신도 많이 성장했다. 이미 23년의 10월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참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이제 곧 있으면 다시 한국에 갈 날이 돌아온다.
아직 사회초년생의 어린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이민 초창기여서 그런지, 정말 하루가 다르게 내 루틴도 성격도 말투도,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있다. 아직 뇌가 말랑말랑한가ㅎ
9월 말, 처음으로 제대로 된 프로젝트 하나를 끝냈다. 재무실사를 하는 부서에서 나같은 병아리들은 보통 재무상태표 or 손익계산서 둘 중 하나를 골라서 아예 엑셀을 처음부터 만들고 모든 분석표를 빌드업하는 업무를 한다.
사실상 제대로 된 분석은 시니어들이 하고, 컨설턴트는 관련된 분석표를 만들면서 자동으로 어떤 분석을 하는지를 일하면서 배우게 된다. 완전 learning by doing이다. 일을 잘 하는 컨설턴트는 앞으로의 스텝이 뭔지를 자동으로 깨달아나가고 다음 프로젝트에서 알아서 하게 되겠지?
현재까지 나는 대부분 시니어들이 주는 분석을 엑셀로 표현하는 업무를 했다. 부끄럽지만 변명하자면, 분석해야할 계약서를 받아도 전부 다 독일어로 돼있으니 내가 .. 뭘 읽고 분석할 수 있겠어? (독일같은 보안에 예민한 나라는 번역기를 돌리지도 못한다.) 그러니 수동적으로 받는 일만 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고, 나도 항상 답답했고 속상했고, 그럴 때마다 '한국 회사였으면 더 빨리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을텐데' 등이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됐다. 해외살이 정말 쉽지 않다 ~
그러나 드디어..! 최근 마지막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모든 재무상태표를 커버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여전히 모든 것이 독일어였기에 영어로 하는 것 만큼 수월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큰 어려움없이 해냈던 것 같다. 물론 실수도 있었지만.. ㅎㅅㅎ
입사한지 7개월차에 드디어 독일어도 B2.1레벨로 올라가고, 혼자 재무분석의 한 파트도 나름대로 커버해나가는 컨설턴트가 되었다! 독일 현지인 눈에는 한없이 부족해보이는 아시아 여자애로 비춰질 수 있겠다만 그래도 나는 타지에서 이만큼 성장한 나를 둥기둥기 칭찬해주련다. 잘했다 수고했다 최고다!!!!!!!!!!!!!!
이제는 8개월차에 접어들어 이번주는 처음으로 워크숍이라는 것도 가보았다. 사실 한국에서 워크숍 한 번도 가본 적 없어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ㅎㅋ 이번에 내가 한 one week M&A Training은 new joiner 대상으로 독일 전역의 M&A 사람들을 모아서 트레이닝과 네트워킹을 동시에 시키는 자리였다.
진짜진짜진짜 개노잼 도시인 하노버로 갔다. 하노버로 트레이닝 간다고 했더니 동료들이 aww I'm sorry for you.. 랬는데 무슨 말인지 알거 같았다. 게다가 북부지방이라 넘 춥고 비오고 ... 진짜 할 것도 없고 중앙역은 전혀 안전해보이지 않고 최악이었다.
하노버랑은 별개로 트레이닝은 나에게 많은 좋은 사람들과 깨달음을 선물했다. 굵직한 깨달음만 나열해보자면
1. 특히 해외에 살수록 더 진취적이어야 한다. 내가 먼저 바뀌고 바꾸어야 한다.
월요일에 딱 하노버 오피스에 세미나실에 도착했는데, 나 혼자 아시아인이고 나 혼자 여자였다. 금발의 남자들만이 득실거리는 방문을 열자마자, 진짜 내가 살면서 이정도로 소수자였던 경험은 처음이라 너무너무너무 당황하고 앞으로의 일주일이 아득해지면서 영혼이 가출할 뻔했는데, 세미나가 시작하고 나서야 다른 아시아인들 그리고 여자들이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백인 남자들이 대다수지만..)
인간은,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편한 것을 선택하게 설계되었다. 따라서 굳이 지네들끼리 무리지어 다니는 그 철없어 보이는 남자들을 뭐라할 순 없지만, 가끔 그 틀을 깨고 나오려고 노력하고 새로운 사람들에게도 말을 거는 사람들을 보면 참 멋있다고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의 나조차도 외국인들에게 나이스하게 먼저 말걸어주지 못했던 것 같거든.. 과거의 나의 머리를 쥐어박아주고싶다. (그리고 걔네들 머리도)
소수자는 가만히 있으면 성취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해외에서 지내고 있는 외국인들이 더 인재인 듯 하다. 살기 위한 본능으로 더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지내왔을 테니까. 갈수록 영어 social skill이 느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한국어 할때는 아닌듯 하지만 ㅎㅋ
2. (생각할수록 빡치지만 아무리 글로벌 기업이어도) 일단 독일어는 잘 해야 내가 편하다.
이번 5일간의 트레이닝은 전부다 독일어였다. 솔직히 이제 B2여서 한국의 고등학교 영어 실력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실력이고, 외국인이 나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전부다 생 독일어로 한다는 거에 좀 화가 났다.
그냥 내가 피피티만 읽고 강의자가 하는 말이 뭔지 1도 못알아들은 채로 멍청하게 자리에 앉아만 있을거면 내가 돈과 시간을 써가며 하노버까지 간 의미가 어디에 있는데? 마지막 날인 오늘, 피드백을 주는 시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한페이지에다가 싹 정리해서 손들고 speak up 하려고 했는데 걍 서베이로 제출하라고 하더라 ㅋㅋ..
이런 것과 별개로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독어를 잘 해야 훨씬 편한 것도 사실이다. 진짜 평생 독일에서만 살아오고 아시아가 뭐하는 대륙인지 중국과 한국이 뭐가 다른지도 모르는 백인 남자들 정말 많다. 뭐 솔직히 나도 유럽 국가들 잘 구별 못했으니 뭐라할 자격은 안 되지만, 이런 사람들이 가장 답답한거는 영어를 잘 함에도 그냥 영어 쓰는거 자체가 불편하고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지 영어를 잘 써주지 않는다. 과거의 한국에 있던 나로 돌아간다면 정말 있는 영어 없는 영어 다 써가면서 외국인들에게 친절히 대해주고 싶다......
그래도 언어는 배울수록 참 신기하다. 우리나라는 형용사나 음성어가 정말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독어는 동사가 참 신기하다. 한국의 많은 단어들이 뜻이 있는 한자를 결합해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어 단어도 단어와 단어가 붙어서 또다른 단어를 형성하는 합성어 형태가 정말정말정말 많다. 그래서 그 단어를 정확히 모르더라도 어느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3.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는 판단할 수 없고 두고 봐야 안다. (사실 두고봐도 모르는 경우가 더 많음)
이번 트레이닝에 유일한 아시아 남자 사람으로 한국인이 있었다. 넘 반가워서 막 말걸었는데 독일 교포였다. 한국말은 하더라도 그냥 말그대로 검머외였던 것 같다. 딱 봤을 때 제일 친해지기 쉬울 것 같았던 사람은 생각보다 친해지기 어려웠고,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던 사람들은 생각보다 넘 재밌고 사람도 착한게 딱 보여서 마지막에 헤어질 때 아쉬웠다.
독일은 진짜로 부자와 부자가 아닌 자의 차이점이 (사립학교를 나오지 않은 이상) 외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privacy를 중시해서 무엇이든지 티를 많이 내지 않는 특성, 그리고 민족 특유의 검소함과 (한국인에 비해) 크게 외모에 투자하지 않는 등 이런 것들도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번에 트레이닝에서 만난 어느 남자분이 정말 너무 초라하게 입고다니고 머리도 안 감은듯한 까치머리로 다니길래 그냥 그런 사람이 한 명 있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저녁에 같이 시티 구경하러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알고보니 엄청난 사업가 집안이었다. 부모님 세컨하우스에서 살아서 편하다면서 아깝다고 호텔 물도 안사먹는다. ㅋㅋㅋㅋㅋㅋㅋ 가끔 이런 일들 있음 넘 신기하다 ^^,,
기타 끄적거리고 싶은 것들..
1. 트레이닝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한국을 좋아하는 아시아인들도 많았고, 진심 �차가워보이는데 알고보니 그냥 숫기 없는 성실한 독일 친구도 알게 되었고, 유머러스한 알바니아 친구들도 사귀었다.
2. 사람들이 좋은 회사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동료들의 수준이 다르고 따라서 내가 피곤해질 일이 많이 없다. 그리고 사실 지금 회사돈으로 지불하고 난생 처음으로 기차 1등석 타보고 있다. ㅋㅋㅋㅋ 진짜 별거 아니고 막상 타보니 더더욱 별거 없다. 그냥 좌석이 넓직하고 사람들이 더 조용하고 교양있어(?) 보이고 깨끗한 정도? 물 하나도 공짜로 안주는 1등석 ^^,, 다만 유럽 기차들의 2등석 혹은 보통칸은 진짜 개념없는 시끄러운 놈들이 종종 있고 짐 도난사건도 많기 때문에 그냥 1등석이 주는 평화로움만으로도 괜찮은 듯하다. 이런 사소한 복지나 혜택들도 회사의 명성과 함께 따라오는 것같다.
3. 계속해서 프로젝트성으로 새로운 일들을 마주하고, 새로운 팀원들을 마주하는 컨설팅펌의 특징은 나에게 꽤나 잘 맞는 듯하다. 계속 한 팀에 머물러 있으면 언젠가는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요즘에는 가끔 한국 드라마 보다가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사람들과 일하는 환경을 보면 좀 낯설고 나는 과연 저렇게 일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막상 닥치면 어케든 하게될 수 있.. 을거임 분명
4. 아참 최근 내 5년 대학생활 내내 쓰던 삼성 노트북을 드디어 청산하고 마소 서피스 프로 9를 샀다. 그리고 운동도 시작해서 갤럭시워치도 샀다!!!!!! 요즘 완전 healthy life실천하는 중이다.. 여튼 서피스도 갤럭시워치도 너무너무너무 만족함 만족도 200퍼
5. 해외에 나와서 더더욱 실감하게 되는거지만 내게 주어진 것에 너무나 감사하게 된다. 내가 한국에서 갖고 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주말마다 맛난거 맥주고 백화점에서 옷 사주시던 엄마나 할머니나 이모, 사회/직장 충고나 이런저런 고민에 항상 지혜로운 답변을 해주던 아빠나 용돈을 매일 오만원 씩 쥐어주시던 할아버지나. 매일매일 당연하게 받았던 것들이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었음을 뒤늦게야 혼자 타지에서 살면서 깨달아가게 된다. 내가 금수저가 아님에 속상해하던 대학시절도 있었지만, 부족함 하나 없이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이나 환경 덕분에 지금의 안정적인 내가 되기까지가 남들에 비해 크게 어렵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6. 어제는 드디어 일주일간의 트레이닝이 끝나고 매콤하고 칼칼한 한식이 너무 땡겨서 저녁으로 바로 한식집에 갔다. 하노버 시내에는 한식당이 딱 하나밖에 없었는데, 엄청 팬시하고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예약제로 받더라. 다행히 우리는 오픈하자마자 가서 얼른 먹고 나왔다. 한국에서 공부한 적 있는 카자흐스탄 언니와 갔는데, 언니가 나에게 말해주길 너 나이에 타지에서 정말 잘 핸들링하고 있다고 말해줘서 뭔가 찌잉 하고 뭉클하고 기분이 좋았다.. 해외에서는 나이를 잘 인식하지 않게 되기때문에 그저 실력으로만 평가받게 되는 듯한데 - 유럽에 와서 살면서 좋은 것도 많지만 힘든 것도 많고 혼자 처리하고 감내해야하는 것들도 많기에. 약간의 스트레스와 버거움이 나도 모르게 쌓여가고 있던 것같다. 그에 대한 보상?과 같은 느낌으로 언니가 넘 잘한다고 얘기해줘서 뭔가 마음이 따땃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지금 타고 있는 기차처럼 쏜살같이 흘러가는 매일매일.. 점점 한국인에서 멀어져가는 나를 느낀다 ^_^... 담주부터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쉽지 않아보인다. 그래도 할수있다 윱캔두잇 아자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