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택트렌즈 부적응자의 깨달음
일 욕심이 많아 대범하고 거침없어 보이는 자아 뒤에는 한없이 소심하고 겁 많은 또 다른 자아가 붙어 있다. ‘덩칫값’이라는 명목하에 부정되고 말았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어찌 되었건 겁이 의외로 많은 나 자신을 나는 부정하지 않고 있다. 인정한다. 그중 나의 대표적 소심한 면모는 렌즈다. 안구에 직접적으로 닿게 되는 콘택트렌즈에 대한 거부감이 꽤 큰 편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납득할 수 없겠지만 그저 렌즈를 든 손가락이 다가오면 자동 반사처럼 눈이 질끈 감겨 버렸던 탓이다. 아마 눈으로 직진하는 손가락이 제 딴에는 이물질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나는 능지처참을 선고받은 김 첨지 마냥 사지가 붙들렸다. 친구들은 내 눈꺼풀을 뒤집어 가며 억지로 렌즈를 착용시키려 한다. 하지만 그 노력도 무심했다. 종내에는 눈물을 끄억끄억 짜내는 내가 바닥에 뒹굴었고, 착용하지 못하고 버쩍버쩍 말라버리거나 찢어진 렌즈들도 바닥에 뒹굴었다. 그 이후로 렌즈는 내 삶에서 그냥 없는 것이었다. 렌즈가 무서운데 라식수술인들 시원스럽게 받았겠는가. 안경도 귀찮은 나는 희뿌연 세상 속에 적응하면서 살아왔다.
엄마와 나는 이솝 우화의 여우를 좋아한다. 본인의 역량이 되지 못해 높은 곳의 포도를 먹지 못하는 여우 이야기다.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인지 능력 부족을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대는 모습은 우리의 소심한 면모를 잘 드러내 주어서이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여우는 포도를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안 먹는 것이라며 나지막이 읊조린다.
아휴, 저 포도는 초록빛만 도는 게 분명 실 거야.
엄마와 나는 반드시 필요는 하나, 하기 싫은 일을 미룰 때는 곧잘 이솝 우화 속 포도 여우의 말을 농담삼아 따라 하곤 했다.
내게 렌즈도 신 포도였다. 내가 착용 못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세상을 깨끗하게 보고 싶지 않아서 끼지 않는 것이었다. 굳이 볼꼴 못 볼 꼴 속속들이 다 볼 필요가 없다며 자위했다. 실제로 뮤지션 이하이도 나를 대변하는 듯 예능에 나와 렌즈와 안경이며 잘 끼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 역시 세상을 깨끗하게 바라볼 필요를 못 느낀다고 했다.
업무상 미팅이 부쩍 많아지면서 구겨진 미간으로 거래처 담당자를 만나는 게 눈 속의 이물감과 온갖 것을 직시하는 것보다 더 두려워졌다. 이것이 10년 만에 렌즈를 다시 도전하게 된 이유다. 렌즈매장 직원이 벌인 한 시간 가량의 사투 덕에 렌즈 착용이 덜 무서워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깨끗하게 바라보는 세상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배워간다.
미간을 찌푸려가며 피아식별을 위해 억지 시력을 짜내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자연스레 간판 속 글씨가 보이고, 희미해진 내 이마의 곰보도 잘 보인다. 예전에는 고사리손을 들고 길을 건너는 아이의 형태만 간신히 보였는데 이제는 그 마음이 보이고, 자신을 대견해하는 그이의 표정이 보인다. 무엇이든 잘 찾아내게 되니 감추고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도 구분이 되고 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고 여겼던 내 성격은 그냥 남들의 시선을 못 보는 내 하찮은 시력이 그럴싸하게 포장되었던 것이다. 내 허물을 무시했던 처사였다. 렌즈는 눈에 착용했는데 시력보다도 나 자신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각이 더 또렷해진다. 내가 무서워했던 건 눈에 닿는 렌즈의 촉감이 아니었다. 마음에 거칠게 와닿는 내 허물과 직면해야 할지 모르는 날 선 비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