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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장 May 22. 2022

불편한 얼굴들

: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과 <사이렌>의 호미들에 대하여

“나는 그거 우울해서 좀 별로던데.”


“어! 맞제 맞제!”


요즘 드라마를 얘기하다가 친구가 불쑥 내뱉었다. 나는 친구의 그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주인공인 그녀의 표정이 싫다. 늘 무뚝뚝하고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하고 다니는 그 얼굴은, 들어오던 복도 걷어찰 것 같다. 우울감을 가져온다. 그녀는 경기 외곽의 시골 마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20대 여성이다. 그 통근길은 왕복 4시간이다. 게다가 집에서는 언니에게 치여 어쩔 수 없이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회사에서는 늘 상사의 눈치를 본다. 옛 남자 친구의 대출금도 대신 갚고 있다. 맹추가 따로 없다. 그녀는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염미정이다.


코로나 이후 더욱 존중받지 못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키워가는 게 요즘의 세대들이라고 했다. MZ세대들은 이런 미정을 보며 동질감을 느낀단다. 분명히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좋은 드라마이다. 하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나를 엄습할 듯한 우울감으로 개운치 못하다. 그런 기분이 쉽사리 이런 부류의 드라마를 시작하지 못하게 한다. 선호하지도 않는 편이다. 동 작가가 썼던 <나의 아저씨>라는 작품과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었던 또 다른 요즘 드라마인 <우리들의 블루스> 역시 비슷한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다.


위의 드라마들은 빈곤 포르노를 어느 정도 표방한다. 딱한 그들의 사정을 더욱 자극적으로 그려내서 힘든 MZ세대의 공감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자칫 빈곤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들의 결론은 소확행으로 마무리되지만 이들의 행복은 고작 이것밖에 될 수 없다는 편견을 씌울 여지가 다분하다.


그러면 나는 빈곤 포르노를 혐오하는 편인가. 호미들의 <상하차>, <사이렌> 혹은 Tracy Chapman의 <Behind the wall>이나 <Fast car>와 같은 노래들은 게토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노래들이다. 몸을 파는 첫사랑이라던가, 생계만이 우선인 삶에 정돈하지 못한 집 그리고 가정폭력으로 희생된 옆집 여자와 같은 스토리를 가감 없이 가사에 풀어놓았다. 이 노래들 이야말로 빈곤 포르노의 대표적인 사례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드라마와 다르게 이 노래들은 최근 내 플레이 리스트에 늘 머물러 있다. 빈곤 포르노를 씌운 드라마들과 빈곤 포르노를 담은 노래들은 어떤 차이가 내게 존재하는 것일까.


이 둘은 가난에 찌든 현실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현실을 어떻게 반영 혹은 바라보는지에 대한 차이가 호불호를 가져온 것이다. 취업에 대한 고민이 짙던 20대 시절에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 속의 한 사회초년생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땐 나도 계약직이었다. 빠듯한 생활비를 고민하던 동시에 정규직 전환에 대해 뜨겁게 갈망하던 사회초년생이 나였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처절하게 애쓰던 나는 그와 동시에 탈 계약직화 된 미쓰김에 대한 동경도 품게 되었다. 이 드라마가 빈곤 포르노와 전혀 상관이 없지 않은 이유는 취준생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과 동료 계약직 직원들의 넉넉하지 못한 사정을 역시 담아내고 있어서 이다. 이 드라마가 여기서 끝났다면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우울하고 찌질한 현실을 담아내고 있지만 현실에서 보기 드문 당찬 직원을 등장시켜 여전히 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갖지 못한 태도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왠지 모를 희망을 안겨준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그리고 <우리들의 블루스>는 암울한 세대들에게 주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적다.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으나 뻥뻥 뚫리는 사이다 같은 에피소드 대신 잔잔한 일상으로 드라마를 채웠다. 말도 안 될지 언정 희망을 보고 싶은 내게는 이 잔잔함이 오히려 무겁다. 이 작품들은 버블 경제 이후 일본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치유물과 닮았다. 힐링이라는 가면 하에 들이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이 나의 행복과 꿈을 너무 작게 규정하는 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나는 크나큰 행복과 대단한 걸 늘 꿈꾸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지지리 궁상들은 꼴 보기 싫다. 허구를 그려낸 드라마를 보면서 만큼은 함박웃음을 얻고 싶고, 거창한 희망도 보고 싶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전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엔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고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후계동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의 모자람을 안심받는 <나의 아저씨> 속 한유라는 이렇게 말한다. 앞서 언급한 치유물 팬들의 마음을 이 대사가 적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결국 빈곤 포르노를 어떻게 관망하는지에 대한 마음의 문제다. 이들의 불행과 가난을 보며 동정심, 공감을 얻는 동시에 내가 그나마 낫다는 위안까지 받아 가는 빈곤 포르노의 목적을, 나는 싫어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빈곤 포르노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빈곤 포르노가 보여주는 현실은 존중한다. 때로는 아름답지 않은 날것의 단어로 나열된 가난의 노래들이 싫지 않다. 그 노래가 지닌 빈곤 포르노의 목적은 미화도, 내가 낫다는 우월의식을 가지는 태도도 아니다. 진실성과 솔직함이다. 이 솔직한 언어로 현실을 고발하고, 그 고발을 통해 나은 내일을 끌어내고자 하는 게 내가 추구하는 빈곤 포르노의 참 목적이다. 호미들도 Tracy Chapman도 그들의 현실을 그저 솔직하게 그려내고자 했다. 그들의 메시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만족하자, 소확행을 찾자’가 아니다. 괜찮지 않은 현실에서 애써 괜찮은 척하도록 강요하는 <나의 해방일지>가 과연 진정한 해방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때론 웃음이 슬그머니 지어지는 장면들도 있으나 사연 많아 보이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염미정의 얼굴도, 민선아의 얼굴도 나는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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