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나무판에 써 내려간 진심
일본 여행 중 나만의 은밀한 즐거움을 슬며시 털어놓자면, 신사마다 대롱대롱 매달린 에마(絵馬)를 구경하는 일이다. 에마는 일본인들이 자신의 소원을 적어서 걸어두는 작은 나무판이다. 평소에는 웬만해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이라지만, 신 앞에 서면 자신의 이름까지 밝혀 가면서 온갖 고민거리를 허심탄회하고 털어놓곤 한다.
에마에는 가족과 주변 지인들의 건강과 행복, 금전운을 비는 등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의 소원은 기본이고, 바람난 남자친구를 저주한다든가(세상을 하직해라!), 도박 중독에 빠진 외아들이 정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든가·····(타이키군! 정신 차려!). 절절하고 파란만장한 개인사가 빼곡하게 적혀 있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게 만든다. 바람둥이였던 옛 남친과 다시 만나는 중인데 이 사실을 남자친구의 현 여친이 알게 되길 바란다든가, 내가 그만둘 용기가 없으니 회사가 망하길 바란다든가 하는 복잡미묘한 소원은 대체 무슨 심리인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드라마나 소설 속 이야기와 같은 에마 사연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나만의 소소한 재미다. 하지만 혹여 내 글을 읽고 일본 신사에서 에마 사연을 노골적으로 근접 촬영하거나, 번역기로 돌려보며 정독하는 일은 부디 삼가길 바란다. 워낙 개인적이고 민감한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다 보니 일본인들끼리는 암묵적으로 조심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발견한 귀여운 소원이 있어서 하나만 살짝 공개하겠다.
“잘생기고, 성격 좋고, 밝고, 키가 크고, 나를 제일 먼저 생각해주고, 성실하고, 머리가 좋고,
같이 있으면 너무너무 즐거운 최고의 남자와 사귀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해주세요.”
from 일본 국적 아무개상
가능성은 희박해보이나, 만약에 이루어진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이분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를 보면, 전 세계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비는 엄청난 소원들이 컴퓨터 화면에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신이 된 짐 캐리가 정신줄을 놓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교토에 있는 야스이콘피라궁에 가면 이 장면이 현실에서 재현된다는 사실. 이곳은 악연을 끓어주는 신사로 유명한 곳인데, 종이에 소원을 적어서 돌에 붙인 다음 구멍을 통과했다가 되돌아 나오면 악연은 끊어지고 좋은 인연이 찾아온다고 전해진다. 한 해가 지나면 쌓인 종이는 태운다고 들었지만, 언제 가더라도 항상 종이가 수북하게 덮여 있어서 실제 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본 적이 없다. 교토에 가면 한 번쯤 가보길 권한다.
올해도 어느덧 저물고 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니 내년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나날이지만, 그래도 빌어본다. 마음속 에마에 살포시 적어서 대롱대롱 매달아본다.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과 건강, 그리고 그대의 안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