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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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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Jun 19. 2024

여름의 메밀



더워도 너무 덥다. 오늘은 최근 들어 가장 높은 온도를 기록한 날이다. 이제 겨우 6월 중순인데 이런 날씨라니, 정말 곤란하다. 더위에 취약한 나는 선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쓰고, 한 손엔 휴대용 선풍기를, 다른 손엔 양산까지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런 날 밖을 걷다 보면 두둥실 떠오르는 음식 하나가 있다. 살얼음이 낀 시원하고 감칠맛 가득한 메밀. 부드럽게 갈린 하얀 무와 초록 대파와 고추냉이를 넣어 육수에 찍어 먹는 판메밀도 좋고, 재료가 한꺼번에 담겨 나오는 냉메밀도 좋다. 가끔 시판용 메밀을 사서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영 맛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음식이든 직접 가서 먹는 게 가장 맛있다. 시원하게 면을 호로록, 국물을 꿀꺽꿀꺽 들이켜야 비로소 제대로 먹는 기분이 든다.


거리를 걷다가 '메밀 개시'라는 종이를 발견할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메밀이 먹고 싶어 진다는 건 여름이 왔다는 신호다. 내게 있어 메밀은 짜증스러운 더위를 견뎌낼 유일한 방패막이다. 여름 내내 메밀만 먹어도 괜찮을 만큼 좋아한다. 오전 내내 도서관에서 졸음과 사투를 벌이며 글을 쓰다가 생각했다. 오늘은 메밀을 먹어야겠다고. 짭조름하게 간이 밴 면을 호로록 먹고 시원한 국물을 목 뒤로 넘기는 상상 덕분일까. 지지부진하던 글쓰기에 조금씩 속도가 붙는다.


나라는 사람이 뭐라고 글을 쓰겠다 아등바등하는 걸까. 내 글이 뭐 대수인가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두세 번, 일주일에도 몇 번씩 찾아온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종종 욕심이 된다. 글 쓰는 기쁨 뒤에 혼자 쓰는 외로움과 좋은 글 따위 평생 쓰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함께 온다. 이럴 땐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시원하고 끝맛이 고소한 아이스라테나 먹는 순간 입꼬리가 올라가는 음식 같은 것.

 

도망치듯 도서관을 나와 근처 식당으로 갔다. 앉자마자 냉메밀 한 그릇을 시켰다. 설레는 마음으로 내 앞에 놓일 음식을 기다린다. 산뜻한 면을 한 입 먹자마자 절로 탄성이 나온다. 딱 이 정도의 시원함, 이만큼의 위로가 필요했다. 한 입 먹고, 국물을 마신다. 또 한 입 먹고, 국물을 두어 번 넘긴다. 이 단순한 반복이 스멀스멀 기어 오는 불안을 가라앉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쓸데없는 고민 그만하고 기운 내서 다시 쓰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기어코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음식이 내게는 바로 메밀이었다.


올여름 내 앞에는 몇 번의 메밀 그릇이 놓일까. 오르락내리락하는 마음을 안고 나는 어딘가의 가게 문을 열 것이다. 후루룩 찹.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여름의 메밀을 먹을 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도망치지 않고, 피하지 않고 모니터를 마주 보려 한다. 어떤 이야기가 나를 부를지 천천히 기다리기 위해. 그렇게 미래의 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타들어갈 것 같은 더위가 덮쳐와도 끄떡없다. 내게는 여름의 메밀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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