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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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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Jul 31. 2024

너는 나의 여행메이트



최근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다녀왔다. 어머님을 모시고 떠난 효도여행이자 결혼 10주년을 기념여행이었다. 닌텐도 월드를 궁금해하던 아이를 위한 서프라이즈 여행이기도 했다. 목적이 세 개나 되는 여행이 순탄할 리 없었다. 아들이자 아빠인 남편과 며느리이자 아내, 엄마인 나의 충돌이 이어졌다. 휴양지보다 걷는 여행이 재밌으리라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오사카와 교토는 하루에 만보 이상을 걸어야 하는 커다란 도시였다. 매일 다리가 부러질 듯 아팠다. 게다가 역대급 엔저로 도시 곳곳에 여행자들이 넘쳐났다. 한국에서는 쉽게 갈 수 있는 카페에 자리가 없었다. 식당도 관광지도 웨이팅의 연속인 쉽지 않은 여행이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여행 계획은 내 몫이었다. 합리적인 동선을 짜야한다는 압박감에 여행을 가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오래 쓰지 않은 일본어는 삐걱거렸고, 야심 차게 준비한 계획들은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님은 몸살이 났다. 한껏 예민해진 남편과 나의 대화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런 우리의 분위기를 녹인 건 바로 아이였다. 눈치가 빠른 딸은 우리 사이를 오가며 마음을 달래주었다.

“엄마, 할머니가 몸이 안 좋으시니까 아빠가 걱정돼서 예민한 거 알지? 엄마가 이해해 줘.”

“아빠, 엄마가 우리 대신 다 알아보고 준비하느라 힘든 거 알지? 가서 고생했다고 얘기해 줘.”

“어휴, 날씨가 더우니까 나도 힘들고 짜증이 난다. 우리 어디 시원한 데 앉아서 좀 쉬다 갈까?”

낯선 도시에서 날카로워진 나와 남편을 토닥이는 건 딸의 다정한 말들이었다. 뾰족했던 마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아이는 훌륭한 여행 메이트였다. 빽빽한 일정에도 씩씩하게 버텨주었다. 모든 변수에 관대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이었다. 낯선 음식도 먹어보겠다며 매일 도전했다. 언제 이렇게 컸나. 딸은 여행 내내 빠른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눕자마자 잠든 고단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어른들 사이에서 눈치 보고 참느라 고생이 많아. 다음엔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둘이서만 오자. 그땐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뛰어놀아도 돼.’ 아이 얼굴에 볼을 비비니 잠결에 나를 꽉 안는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공항에서 짐을 잃어버릴 뻔하다가 겨우 찾는 해프닝을 마지막으로 여행이 끝났다. 아이는 돌아오는 너무 즐거웠다며 또 오고 싶다고 했다.

“정말 즐거웠어? 다리 아프고 힘들지 않았어?”

“힘들긴 했는데 일본 사람들은 이런 음식을 먹고 이런 말을 쓰면서 살아가는구나 알 수 있었어. 할머니랑 아빠가 걷는걸 뒤에서 보는 것도 좋았고. 이렇게 다 같이 여행하기 힘든 걸 아니까.”

여행 내내 걱정하고 짜증내기 일쑤였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조금만 여유로웠다면 어땠을까. 더 많은 기쁨과 추억을 가지고 올 수 있었을 텐데.


아이 학교에서 다양한 서류가 도착하면 나는 부모로서 이름을 적고 사인을 한다. 그럴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아직도 어린 시절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데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니. 정갈한 글씨로 사인을 하고 나면 조금 으쓱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컨디션에 따라 기분이 널뛰는 내가 정말 어른이라 할 수 있을까. 한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인지 언제나 의문이었다. 그러다 비행기에서 나눈 딸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알게 되었다. 정작 나를 보호하고 기다려준 건 아이였다는 것을.


누군가는 우리를 보며 친구 같다고 한다. 엄마랑 딸이 살가워서 보기 좋다 할 때도 많다. 하지만 다정한 말로 나를 보호하고 있었던 건 바로 나의 아이였다. 무너질 것 같은 날에는 ‘나는 엄마가 너무 좋아’라는 말로 나를 일으켜 세우고, 글쓰기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을. 땐 ‘나는 엄마가 쓴 글이 좋아’라는 말로 응원해 주는 나의 보호자. 어쩌면 아이는 끈기 있게 나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라는 이름에 대해 알아가고 배우는 시간을. 바다 같은 마음을 가진 딸이 지켜봐 준 게 아닐까. 어른스러운 아이와 어른스러워야만 하는 엄마가 만드는 나날들. 너는 나의 여행메이트이자 인생을 함께 만드는 친구. 우리는 함께 자란다. 부족함을 채우고 보듬으면서. 오늘도 내일도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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