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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Oct 04. 2023

아이에서 성인이 되며

둘째 이야기

  20대의 내겐 이해 불문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가 넓은 편이지만 어릴 때는 그러지 못했다.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불가능하다는 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게 다름 아닌 가족과 가정이라서 유년은 고달팠다. 아무래도 괜찮으니 다들 시종일관 똑같길 바랐다. 아빠는 언제나 있거나 쭉 없기를, 엄마는 아빠와 헤어지거나 그도 아니면 싸우지 말기를, 언니는 마냥 착하거나 한결같이 나쁘기를 소망했다. 내게 있어 가정은 시시각각 변하기에 까다로운 집단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하염없이 고생시켰고, 엄마는 아빠를 보란 듯이 미워했으며, 언니는 때를 가리지 않고 난동 피웠다. 어느새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나는 답답해졌다. 가족이란 대상은 인식했으나 가정이 무엇인지는 모르니 사고회로는 이상하게 틀어졌다.


  아빠와 달리 항상 곁에 있으며 귀가도 정확한 엄마에게 "엄마는 책임감 때문에 날 키우는 거야?" 물어보았다. 아빠는 돈이 없는데 다정했고 엄마는 돈을 버는데 무서울 때도 있었다. 피로한 엄마가 환하게 웃어만 대는 날은 명절이었다. 외가에 가면 엄마는 무장해제 되었다. 깜찍한 목소리로 종알댔고 사람들에게 치댔다.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엄마가 날 거들떠보지 않을까 봐 낯설어진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엄마가 사랑하고 엄마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많다는 걸 인식하자 내 존재는 갈 길을 잃었다. 또 다른 가정이 있는 엄마가 부러운 한편, 엄마와 가까운 이들에게 질투도 났다. 나와 동일한 울타리를 벗어나 저쪽 집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로 떠나면 어떡하나 겁을 먹었다.


  친가는 외가처럼 하하 호호 웃어대는 사람들이 없었다. 격식을 차린 낯선 공기 안에서 친밀함은 파스스 부서졌다. 친가와 외가 모두 '친척'이라는데 내 눈엔 전혀 달랐다. 내게 친척은 친가였고, 외가는 '엄마의 또 다른 집'이었다. 외가에서 받는 예쁨은 엄마 때문이라 여겼다. 엄마를 향한 사랑이 넘쳐서 딸려 있는 나도 적시는 것만 같았다. 외가 어른들은 아빠를 못마땅해하니까 나까지 밉상으로 보일 거라 판단했다. 아빠가 외가에 오든 오리무중이든 나는 엄마의 자식이면서 아빠의 자식이니, 대신 질타 받는 기분이었다. 외가에선 재미난 일들이 많이 벌어졌지만 때로 좌불안석이기도 했다. 엄마가 어깨에서 내려놓지 않은 게 '책임감'이라면 내가 엄마에게  건 '죄책감'이었다. 아빠 한 사람만 엄마를 힘들게 하는 줄 알았는데 어른들 얘기를 들면 나와 언니도 포함인 듯싶었다. 사랑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아서 "가족끼리 사랑해야 한다"는 공식은 어느덧 머릿속에서 깨졌다. 아빠, 엄마, 언니는 내 가족이지만 사랑과 엮어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이 <나를 위한> 행동을 보일 때면 "왜?" 진심으로 놀라했다.




  어금니를 처음 빼는 날, 엄마는 나보다 더 심하게 울었다. 보다 못한 의사 선생님이 보호자는 밖에 나가 계시라며 한소리 하였다. 다른 어금니를 빼는 날에도 엄마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내 이빨을 빼는 왜 엄마가 울까' 아리송했다. 10살 때 전염성 눈병에 걸리며 학교를 열흘 가까이 못 나갔다. 점심시간이 되면 엄마가 부랴부랴 왔다. 엄마 얼굴보니 좋으면서 의아했다. 은 혼자 먹어도 되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점심시간을 촉박하게 보내니 미안도 했다. 눈병이란 걸 알았을 때 담임 선생님에게 크게 혼났다. 선생님은 학급 전체를 신경 쓰느라 그러신 걸 테지만, 아무 데도 손대지 말라는 호통에, 쫓기듯 나가면서 울음보가 터졌다. 엄마는 선생님 의도를 설명해 주었다. 내 눈병은 해를 끼칠 수 있으니 애들과 있으면 안 된다 걸 이해했다. 눈에 안대가 씌워지고 나서도 '격리'만 기억하곤 '엄마는 왜 자꾸 나랑 있으려 하지?' 답답해했다.


  내 나이 7살에 아빠는 곁에 없었다.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아빠들과의 합동 무대가 있을 모양이었다. 우리 아빠는 안 올 예정이니 나는 연습 시간에 열외 되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춤출 동안 혼자 가만히 앉아 있는 걸 엄마가 목격하고 나선 그날부로 유치원에 나가지 못했다. 곧 있으면 초등학생이 되는지라 다른 곳에 보내는 대신 한동안 집에 있다. 이때 일은 머릿속에 사라지고 유치원을 졸업 못한 것만 남았다. "왜 유치원을 관뒀지?" 물으면 엄마는 감추지 않고 다 말해 주었다. 아빠가 꼭 있을 순 없으며 이는 차별거리가 아님을 일찍이 알았다. 하지만 유치원을 관둘 만한 일로는 비추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엄마로서 어떤 마음>이기에 서러워 한 건지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내 나이 9살에 아빠는 곁에 있었다. 이 시기 학급 남학생들한테 괴롭힘 당했다. 원래부터 자존감이랄 게 없던 탓에 '왜 저러지?' 이유를 찾으면서 대응 못했다. 하루는 하굣길에 한 남학생이 내 책가방을 향해 하이킥을 날렸다. 휘청이다가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건만 남학생은 웃고만 있었다. 또 엉엉 울면서 귀가했다. 집 아무도 없어서 토로할 타이밍을 놓 탓에 마음은 진정됐다. 이후 아빠한테 이 얘기를 꺼내자 아빠 안색이 확 돌변했다. 그 남자애를 찾겠다고 뛰쳐나갔다. 아빠는 막노동과 농사일로 다져진 힘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나는 넘어지지 않았지만 남자애는 작살나는 게 아닌가 싶어 아빠를 뜯어말렸다. 아빠 반응에 남자애가 크게 잘못했음을 알았다. 5학년 때 그 남자애와 또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9살엔 쫄아 있었지만 12살엔 조심히 말 거는 게 가능해졌다. 남자애는 사과하였다. "기억 안 나는 게 부끄럽다, 내가 그리 굴었다니 미친 거 아니냐, 정말 미안하다" 싹싹 빌었다. 이때도 친구 생각만 했지, 생애 처음 보는 <아빠로서의 분노>에 '그리 화낼 일인가' 당황했다.


  언니는 가장 대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현장체험학습으로 롯X월드에 다녀오곤 배 아프다며 화장실로 직행하였다. 언니가 내팽개친 가방에서 웬 인형들이 보였다. 언니가 나오곤 "이게 뭐야!!!" 방방 뛰자 언니가 버럭 화를 냈다. "왜 꺼내! 내가 이걸 어떤 마음으로 샀는데…" 어울리지 않는 눈물을 보이더니 갖고 가 버렸다. 당시 우리 자매는 초등학생이었다. 언니는 구기 운동, 자동차 모형, 게임 같은 것만 좋아했다. 인형을 보자 '오잉? 이건 내 건가?' 알아차리기만 하곤 <언니의 의도>는 고려 못했다. 유원지 상품이니 얼마나 비쌌겠으며, 소풍 간다고 받은 용돈이 얼마나 됐겠는가. 군것질거리 참으면서 동생 놀라게 해 주려고 데려온 작은 인형들이었다. 언니는 한없이 못되진 않아서 이내 주었다.


  사춘기 절정을 찍은 언니에게 "내가 널 왜 좋아하니" 소리 듣고는 '그럼 나도 안 좋아할 거야' 속으로만 받아쳤다. 그 시기 언니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니는 부모님과는 깊게 부딪치면서도 내겐 "이 새끼가!" 위협하다가 "으이구" 봐주었다. 친구들을 데려오면 "뒤질래?" 성깔내면서도 배달 음식 사 먹으라고 돈을 주었다. '마스킹테이프'라는 걸 수집할 때 언니는 대만 여행을 떠났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마스킹테이프 비주류 문구였지만 대만에는 널려 있다고 들었다. 언니에게 매달려 받은 봉투 안에는 수집용과는 거리가 먼, 예쁘기보단 촌스럽고 고급지기보단 질 낮은 묘한 테이프들이 들어 있었다. 언니는 제주도로 수학여행 다녀올 때도 사 왔다. 종이 질감인 마스킹테이프가 아니라 그림이 그려진 접착테이프였다. 동생이 '찐따'처럼 구는 걸 놀려대면서 모으는 게 '테이프'인  기억하고는 테이프가 보이면 이것저것 사 온 거였다.




  일찍이 의문을 안긴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족'인 까닭에 가족이라는 껍질만 바라보았다. 그 안의 알맹이는 남다르다는 걸 몰랐다. '사람'은 한 면만 지닐 순 없다. 울화통 터지게 만들고도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렀던 아빠, 아예 안 나타나길 바라면서도 연락을 끊어내지 않던 엄마, 성깔을 있는 힘껏 내면서도 동생을 우선으로 두었던 언니. 이들은 가족이기 전에 나와 다른 타인이다. 세상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마냥 좋을 수도, 마냥 나쁠 수도 없다. 하나 오늘 보고 말 사이가 아니니 좋고 나쁨 중 어느 비중이 큰지 '따지기'보단 그저 '살아는' 게 아닐까. "책임감이 있다고(없다고) 사랑이 없는 건 아니야" "화낸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세 사람은 이해력 딸리는 둘째에 이 설명이 필요하다는 걸 간과했다. 싸우고도 부대끼는 건 우리 집에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내일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흐름이었나 보다. 그 사이 사과와 반성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말 안 해도 알지?"라는 식으로 넘어들 갔다. 나만 "말 안 하면 몰라요!"였는데 안 그래도 꼬마 시절부터 말수가 적어서 "알려주세요!" 티 내지 못했다. 유년에 가정으로 인해 허덕이고 있었던 걸 가족들은 모 체했던 게 아니라  몰랐다고 한다.


  "엄마가 처음이라서", "부모가 처음이라서" 같은 말이 들릴 때면 무척 싫었다. '처음'에 꽂혀 "언제까지 처음인데요?" 궁금했다. 지금의 나는 우리 부모님이 나보다 앞선 생을 살아왔기에 존경한다. 아빠로서 어떠했고 엄마로서 어떠했는지 줄줄 읊을 순 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단순타인이 복잡한 가족이기도 한 게 더 중요해서다. 한 살 한 살 넘길수록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다. 이 세상은 시험 문제처럼 정답 아니면 오답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O와 X로 딱 떨어질 수도 없다. 그 사이 P에서 W를 포함해, O 앞 A부터 N까지, X 뒤 Y와 Z 등 골고루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같다. 사회를 보려니 가정이란 집단이 밟혔는데, 가족을 받아들이자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 넓어져 간다.


가정을 끈끈하게 해주는 일등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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