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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단 Jul 07. 2024

청산은 나에게

2002년 옥천신문 기자가 된 이후 열정적으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는데 어떤 조직이든간에 1,3,5,7,9년으로 위기가 온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3년차 되던 해에 약간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찰나였다. 반복되는 행사와 지속되는 민원과 제보에 심신이 지쳐 있을 무렵,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신문사와 하는 일에는 매우 만족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축적했던 것을 탈탈탈 털어버려서 스스로의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일터와 지역은 떠나지 않고 어떤 변화를 꾀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사는 곳을 이사하기로 했다. 어떤 난관에 봉착했을 때 있는 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가서 생각하는 것이 습이 됐다. 대학 시절 취업이 안 되고 힘들었을 때 자전거 타고 제주도까지 혼자서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옥천읍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청산면으로 지피에스를 찍고 청산면의 마을 중 마을탐방을 하면서 거처를 정하기로 했다. 약간의 사심을 품고 마을탐방기를 청산쪽으로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 지형 조건이나 마을 형성으로 볼 때는 의동리가 마음에 들었다. 언덕을 넘어서 확 펼쳐 보이는 마을의 형세가 마음에 들었다. 약간 동이면 지장리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의동리로 좌표를 찍고 빈집을 구했는데 쉽지 않았다. 청산면을 그렇게 맴맴 돌다가 백운리에 집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른 가봤다. 3천평 과수원에 집 한채가 덩그러니 있었다. 청산고등학교 바로 옆에 이석영씨가 살던 집이었다. 오래된 집이 마음에 들었다. 보증금도 없이 연세 200만원을 내고 계약을 했다. 그런데 이석영씨 부인이 하룻밤만 집에서 자고 올라가고 싶다고 해서 부인과 딸들이 안방에 묵고, 나는 건너방에서 자면서 기묘한 하룻밤 동거를 했다. 그런데 새벽이 일어나보니 구급차가 달려오고 우는 소리가 들리고 난리가 아니었다. 문을 열어보니 이석영씨 부인(할머니)이 잠을 자다가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쉰이 넘은 두 딸들은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고 옥천성모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렀는데 안 가볼 수가 없었다. 부의금을 내고 절을 하는데 그 아들이 나한테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계약을 안 하셔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전혀 무섭거나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명복을 빌어드렸을 뿐이다. 평생 정든 집을 떠나기 싫었던 것일 게다 서울로 가기 싫고 남편이 보고 싶어 무지개다리를 건너신 것일 거다. 잘 보내드리고 그 다음날부터 나는 청산에 기거했다. 면에 산다는 것은 읍에 사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로움으로 찾아왔다.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익명성이 날개를 달아 저만치로 날아갔으며, 조금 더 밀착해서 내 지역, 내 삶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맨 처음 전입신고를 할 때 면 직원들은 싫어했다. 기자가 왜 연고도 없는 면에 와서 사느냐고 수군수군 대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면에 살면 잘못한 것만 보도해서 면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 아니냐는 그런 걱정이었을 게다. 

나는 아랑곳하지 전입신고를 했고 면 젊은 공무원들과도 친해져서 대전과 청주에서 출퇴근하는 공무원들이 우리 집에 같이 기거하기도 했다. 저녁에 와서 치킨과 피자를 시켜먹고 면사무소 2층에서 탁구도 치고, 같이 산책도 하고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청산초등학교에 아침에 가서 일찍 나온 아이들과 축구도 하고, 금요일마다 학교 강당에서 영화를 보여주곤 했다. 학교도서관 야간개방운동을 이끌면서 한겨레 작은도서관 대상을 받은 기억도 있다. 그리고 벼룩시장도 했고, 야간자습을 끝내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비빔밥을 해 먹었던 기억도 있다. 청산에서 주민들과 함께 여러 실험을 했다. 그 기억이 아직도 나에게 힘을 준다. 

청산면에서 옥천읍으로 출퇴근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았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들어가는 기름값도 만만치 않았다. 마감날에 청산 집에 들어갈라 치면 졸음운전에 노출되어 곳곳마다 자다 가다를 반복하며 청산에 새벽 6시에 도착한 적도 많았다. 궁촌재에 주차를 해놓고 자고 있었는데 일어나보니 아침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경관이 바로 절벽이라 화들짝 놀라 떨어져 죽는 줄 알았던 적도 있었다. 
당시 그리고 아이들 사진도 많이 찍었다. 초등학교 청소년기자단도 운영을 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목욕탕에도 가고, 영화 보러 가기도 하고, 한다리 밑에서 수영을 했던 기억도 난다. 3년 정도 청산면 생활을 했는데 내인생의 3할은 청산면 생활에 빚을 지고 있다.
내가 다시 청산면으로 오게 된 것도 그 이유이다. 옥천에서 가장 먼 변방, 청산면에서 변화를 꾀하고 싶다. 인구소멸의 최전선에서 나름의 삶으로 함께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블로그에 가보면 청산면 사진들이 있다. https://blog.naver.com/ijazz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은 이제 다 큰 성인이 되었더라. 20대와 30대가 된 청년들의 어린시절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 참 좋다. 나와 같이 성장한 아이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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