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 소주병의 글씨가 안 보여요
[내 삶의 추억이라고 되새김질할 만한 기억들은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벌어지고, 그로 인해 생겼던 무수히 많은 상처들이 모인 집합체가 아닐까. 패기와 열정은 잦아들고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이 커져 버린 나이지만, 그렇다고 상처받을 일을 미리 두려워한다면 내 인생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그 인생은 행복할까?]
- 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한설희
40대의 기혼인 가장은 안정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출을 앞둔 금융기관은 고객의 상환력을 평가한다. 과연 이 고객이 대출금을 성실히 갚아 갈 수 있을 것인가? 흥미롭게도, 상환력은 20대보다 40대에서 더 높게 나타난다. 지칠 줄 모르는 패기와 열정보다는 가정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과 끈기가 안정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통계에 기반한 이야기로 모든 20대가 40대보다 상환력이 낮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이가 주는 안정성에 대한 나의 믿음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이런 안정성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시도조차 하지 않는 포기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몇 해 전부터 천천히 노안이 찾아왔다. 녹색 소주병에 적힌 깨알 같은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아무리 흔들고 인상을 쓰며 정신을 집중해도 도무지 초점이 맞지 않는다. 처음엔 술에 취한 탓이라며 넘겼다. 나쁜 성분을 숨기기 위한 주류사의 음모라고 농담도 했다. 그러나 안경점에서 들었던 말은 현실을 부정할 수 없게 했다.
“지금보다 안경 도수를 높이면 더 잘 보이겠지만, 노안 때문에 가까운 건 더 안 보일 수 있습니다.”
결국 도수를 유지해야 한다는 권유를 받았다. 젊은 시절에도 좋지 않았던 시력에 난시까지 겹쳤던 나는 작아진 글씨를 읽기 위해 얼굴을 찌푸리거나, 수시로 안경을 이마로 올려가며 내려다보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노화는 눈에 띄게 찾아온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30대를 전후해서 서서히 신체적 퇴화를 겪는다. 노안만이 아니다. 예전에는 많이 먹으면 그대로 소화가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복부에 불필요한 저장을 시작했다. 초콜릿 복근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옆구리를 잡으면 힘을 줘도 살이 느껴질 정도다. 이런 신체적 변화보다 더 불편한 건 기억력 감퇴다.
사람 이름이나 영화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대화 중에 “그, 있잖아… 저기 뭐더라…” 같은 뜸이 길어졌다. 이런 변화를 느낄 때마다 자신감이 조금씩 줄어들었던 것 같다.
신체적 노화도 불편 하지만 신체의 변화보다 더 큰 문제는 정신적 변화였다. 나이가 들수록 축적된 경험은 판단력을 키워주는 동시에 고정관념이라는 그림자를 남겼다. 실패의 기억은 두려움이 되고, 도전하기도 전에 포기를 강요했다.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줄여가며 좁아진 시야는 점차 나를 무기력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경험이 축적되고 그에 따른 안정감이 높아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안정감 때문에 도전을 꺼리는 태도로 변질되는 건 아닐까. 나 역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지금 안정된 것일까, 아니면 위축된 것일까?’
노화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신체적 퇴화를 넘어서야 한다고 믿는다. 신체적 변화는 과학과 의학으로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의욕과 열정은 개인의 태도에 달려 있다.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노화가 가져다주는 제약도 나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안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작은 불편함을 감수하기보다는, 다초점 렌즈를 알아보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시야를 찾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라는 말에 쉽게 안주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은 축적되지만, 그 경험이 고정관념으로 굳어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노화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면,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놓아야 할 것은 조급 함이지 열정이 아니다.
나는 노화를 받아들이되, 주어진 순간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 싶다. 나이가 들면서 더 풍부해지는 것은 삶의 깊이이지, 삶에 대한 무기력이 아니어야 한다. 앞으로도 나는 작은 도전이라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배에 지방이 더 축적되기 전에 플랭크를 늘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