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수고로움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되고 싶어. 나 다운 인간이 되고 싶어 회사를 도시생활을 박차고 나왔지만, 시골생활을 한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한 인간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모든 일에는 그만큼의 수고로움이 필요한 법이니까
- 이번 달만 버텨봅시다/ 글. 정안나, 그림. 안희원]
“미안합니다. 일한 돈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어요. 며칠만 기다려주시면 돈이 들어오는 대로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미련한 평화주의자는 마음 다치기 십상이다.
나는 여신전문금융기관, 흔히 말하는 캐피탈 회사에서 근무했다. 주 업무는 대출 영업이었지만, 연체된 고객 관리는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일이었다. 금융회사는 이자와 원금을 회수해야만 굴러가니까. 영업과 회수가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었지만, 둘 다 중요하다는 이유로 내 손을 떠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농담이 이렇게 와닿을 줄이야.’ 일부 고객들은 처음부터 작정한 듯 대출을 받고 나서 막무가내로 나오곤 했다. 녹취와 동의를 다 받아놨음에도 “내가 언제 그랬어요?”라는 태도로 나오면 결국 법적 절차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는 차라리 수월했다.
그런데 대다수의 고객은 다르다. 사연은 구구절절했다.
“일이 없어요.”
“일한 돈이 안 들어와요.”
“사고가 났어요.”
어떤 말은 사실일 테고, 어떤 말은 절박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핑계일 것이다. 사실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짐작만 할 뿐. 말을 다 들어주자니 나와 회사가 곤란하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측은함이 나를 압박해 왔다. 결국 대부분은 실리를 선택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니 대부분 마음을 다치곤 했다. 심지어 실적을 위해 냉정하고 매몰차게 다그칠 때면 “내가 혹시 TV에 나오는 악덕 사채업자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스쳤다
회사를 나온 뒤엔 선배의 중장비 매매업을 도왔다. 사실 큰 자본이 없었기에 장비를 사고 되파는 것은 무리였고, 주로 중개업을 하는 플랫폼을 운영했다. 선배의 사무실과 홈페이지가 있어 시작은 수월했다. 나는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유튜브용 홍보 영상을 제작하며 활기를 찾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시장에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가뭄에 콩 나듯 거래가 성사되었지만, 이후 방문자와 구독자가 정체되면서 사무실 운영비만 나갔고 결국 사업은 휴업 상태에 이르렀다.
백수라는 사실을 노출시킨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유튜브 알고리즘은 자꾸만 돈 되는 영상을 추천했다.
“집에서 한두 시간만 투자하면 몇 백만 원을 벌 수 있다!”
유튜브에 무료음악으로 영상을 만들어 노출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나도 가끔 일 하거나 책 읽을 때 유튜브로 클래식이나 재즈를 틀어 놓기도 하고, 카페에서 많이 사용된다고 하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무료 음악으로 클래식과 재즈를 모아 영상을 제작했다. 열심히 올렸지만 구독자는 5명 남짓. 결국 그 채널은 내가 책 읽을 때 듣는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유튜브는 또 다른 돈 되는 영상이라며 노출시켰다. AI가 발전하면서 누구나 손쉽게 아이콘을 만들어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저녁때 단 몇 시간만 투자하면 부수입이 생기는데 왜 하지 않느냐면서 다그치는 영상도 있었다. 호기심에 AI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였다.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마우스로 드래그하면 연관된 아이콘이 자동으로 생성되었다. 만들고 저장하고 업로드하는 모든 과정이 간단했다.
이런 것으로 돈이 된다는 게 납득은 안 됐지만 판매 사이트에 올리려고 들어갔을 때 그제야 느낌이 왔다. 내가 만든 아이콘과 유사한 아이콘이 이미 수도 없이 올라가 있었고 퀄리티도 내가 만든 것과는 비교도 안될 수준이었다. 비슷한 판매사이트들이 다들 그랬다. 기왕 만든 거 혹시나 하는 마음도 들어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일단 업로드했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리틀포레스트의 감자싹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판매소식을 기다렸지만 역시 예상대로 소식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숱한 돈이 된다는 영상들은 처음 했던 사람이나 좀 벌었을 것 같다. 이후에 돈이 된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여서 콘텐츠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돈이 안될 무렵 나 같은 절박한 백수들을 유혹해서 조회수 장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낚시 영상이지 싶다. 없는 것도 서러운데, 괜한 것에 시간을 쓴 것 같아 더 억울했다. 그런데 누구 탓을 하랴. 백수가 없는 건 돈이요 남는 건 시간이니 경험한 셈 치기로 했다. 처음 누군가는 쉬운 일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다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누군가 전문성을 갖게 되면 쉽게 하는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회사를 다니건, 자영업을 하건 보편적으로 쉽게 돈 버는 일은 세상에 없다. 있다면 내가 다 할 것이고, 손이 모자라면 가족에게나 알려줄 것이다. 나는 이제 쉬운 일이라는 말을 함부로 믿지 않는다. 해보지 않은 일을 쉽게 보는 일도, 한번 해봤다고 다 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쉬운 일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쉽다고 들은 것들이 나한테는 어렵고 반대로 내가 쉽다고 한 들 다른이 도 쉽다고 여기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일이란 자고로 일정 부분 수고로움이 따른다
[이번 달만 버텨봅시다]는 회사를 그만두고, 식당을 운영하며 초보자영업자가 겪는 고충을 재미있게 그려낸 에세이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버티라고 말한다. 아마도 수고로움이 모든 일에 필요하니 직업은 바꿀지언정 인생은 버티기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을 원망할 것도 없고, 나를 자책할 것도 없다. 지금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고 갖은 풍파를 견디고 나면 나에게도 쉬워지는 일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