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라시아 Oct 24. 2021

슬럼프를 이겨내는 39가지 방법_1

1. 슬럼프는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스물여덟쯤 됐을 때였을까.. 친구 S양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혼. 전. 임. 신 소식이었다. 혼전임신이 지금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지만, 그 당시엔 아니었다. 적어도 내 주위에 혼전임신을 한 친한 친구는 S가 처음이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 가정선생님께 배웠던 숨 막히는 옷차림을 서른이 넘어서 까지 지킨 사람이다.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처음, 겹겹이 챙겨 입은 속바지 없이 스커트를 입었을 정도로 조금은 고리타분 한 사람. 아마도 이런 나였기에 내 주위에도 약간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그때까지만 해도 내 주위에 혼전임신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 S가 소위 말하는 날라리도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28살.. 피가 뜨거운 나이가 아닌가.


사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지만 지금도 계획하지 않은 혼전임신은 당황스러운 법인데, 거의 10여 년 전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S는 당황했고 당혹스러워했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은 태어나서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고. 이렇게 괴로워 본 적이 처음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런 친구의 괴로운 심정을 위로해 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떻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지금 처음 할 수가 있지?'


기억을 돌이켜 보면 내가 처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쯤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내일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   


시골에서 살다가 학업을 이유로 도시로 전학 오고 나서는 특히 더 심했던 것 같다.


인스타그램:  j_hoooong


나는 친구 S의 말에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던 것 같다. S는 형제가 많은 집의 아이로,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에게 보살핌을 많이 받지 못해서 글을 떼는 것조차 조금은 늦었던 친구다. 그럼에도 항상 밝고 따뜻한 긍정적인 친구였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정말 마음이 단단한 친구였던 것이다. 28살까지 단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니..


S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가장 큰 위기를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으로 잘 이겨 냈고, 그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랑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지식'과 '지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결이 다르다. S의 최종학력은 고졸이지만 나는 그녀 만큼 '지혜'가 차고 넘치는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했다. 내가 곁에서 오랜 시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녀는 언제나 지혜로웠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테지. 그리고, 그 지혜의 뒷 면에는 항상 따뜻한 감성이 있었다.


S는 상대방이 아직 뭘 잘 모르는 어린아이 일지라도, 자신이 낳고 키우는 어린 자녀들일 지라도, 따뜻한 시선과 역지사지 마음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늘 생각했고,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배려한 해법을 찾아내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당연하게 여겼다. 결코 귀찮거나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S처럼 타고난 긍정 에너지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강철 멘탈의 소유자도 있는 반면에, 초등학교 때부터 '우울'의 기미를 보인 나 같은 두부 멘탈의 소유자도 있는 법이다. 나는 S가 아니고, S가 될 수도 없다. S에게 배울 수는 있어도 그녀와 같아질 수는 없다. 그렇게 태어나질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너무 예민하고 너무 생각도 많다.


나는 눈치는 없는데 감정은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다. 최악이지.. 하하(그래도 어떻게든 살아 냈고, 살고 있다.)


언젠가 한 번은 지금의 고통을 끝낼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파우스트에 심취해서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 지. 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악마는 내 영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굉장히 괴롭고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낸 건 아니다. 나는 충분히 부모님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고, 많진 않지만 친구들과 늘 함께 했다. 때마다 동아리 활동도 참여하고, 땡땡이도 치고, 그다지 잘날 것도 못날 것도 없는 눈에 띄지 않는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조금 못났으려나? 잘 나진 않았지..) 다만 그저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우울을 약간 가진 그런 아이였다.


그렇게 지내다가 대학을 갔고 대학생활은 나름 즐거웠다. 마음속에 항상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잠시나마 누그러 졌고, 몸에 박혔던 가시들이 떨어져 나갔던 시기였다. 타고난 아웃사이더 기질을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빛나는 시절이었다.


20대의 빛나는 광채가 나의 내면의 어둠을 잠시 가려 줬지만, 4년은 생각보다 짧았다. 준비되지 않은 졸업은 '혼돈' 그 자체였다. 몸만 어른이 된 아이인 채로 사회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렇게 나의 'with 슬럼프'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학교라는 울타리와 학생이라는 신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힘이 컸다. 울타리와 신분을 잃은 나는 무력했다. 그리고, 가진 능력에 비해서 꿈은 너무 원대했다. 한 마디로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매우.


부모님의 배려로 한 1년? 2년?정도는 자격증도 따고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수업도 받으면서 도서관과 집을 오가면서 취업준비를 했다. 그 당시에 내 주위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머리를 아무리 싸매도 본능적으로 그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어떤 길인 지는 몰랐으나, 그 길은 아니라는 왠지 모를 확신이 있었다.


그 당시 나를 제외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함께 하던 지인들의 대부분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3분의 1 정도가 합격을 한 것 같다. 3분의 2는 떨어졌지만, 잘 살고 있다. 살면서 어떤 시험 하나가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시험에 떨어져도 다른 길이 있으며, 나에게 주어진 행복한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의 나의 삶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답답한 마음에 엄마가 찾아간 점집에선 내 나이가 26살이 넘기 전엔 제대로 자리잡기 어려울 것이라고, 그러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도 않았고, 마음을 편히 하지도 못했다.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를 만나다면, 어깨를 토닥여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안 된다고 자책하지 마. 너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지 마. 조금만 마음을 편히 먹어. 곧 '통과' 할 거야. 지나갈 거야.  내가 장담 해. 네가 조금 덜 괴로워했으면 좋겠어."


롤러코스터 같았던 24..25..26을 통과해 어렵게 스물여덟에 겨우 안착했다. 그리고, 스물여덟에서 아홉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들어간 회사를 그만뒀다. 그만 둘 때는 호기롭게 그만뒀지만 후폭풍이 거셌다. 나이가 어느 정도 먹은 현대인이라면 다들 느낄 것이다. 숨만 쉬어도 돈이 필요하다 라는 사실을 말이다. 누굴 만나지 않아도, 어딜 가지 않아도, 휴대폰비 등 각종 고정비용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연히 모아둔 돈은 없었다.


그때쯤 주위에서 하나둘씩 친구들이 결혼을 했다. 빠른 친구들은 돌잔치도 했던 것 같다. 결혼식은 돼지저금통을 털어서 갔고, 돌잔치는 도저히 갈 여력이 없어 가지 않았다. 겨울에 갔던 친구 M의 결혼식이 생각난다. 친하지만 절친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관계. 하지만 그때는 어렸고 그 정도 친분이면 참석했다. 사실 지금의 나의 마음가짐으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 결혼식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봄이나 가을에 결혼을 하는데 그 친구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한 겨울에 결혼을 했다. 아마 아홉수를 넘기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도 같다. 그런데, 결혼식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갈 차비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옷 깃을 여미면서 찬바람을 맞으며 반쯤 얼은 길을 한 참을 걷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한참을 걷다 보니깐 화도 나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담담한 마음으로 다시는 이런 길을 걷지 않을 정도는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오늘 같은 일은 또 없게끔 해야지'라고 다짐했고, 다행히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나는 그렇게 20대의 슬럼프를 통과했다.










작가의 이전글 슬럼프를 이겨내는 39가지 방법_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