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igmouth Jul 14. 2021

첫 해외출장을 아프리카로 가다(2)

살면서 특별했던 첫 경험, 그 순간의 감정

1화는 아래 링크에서 봐주세요.

https://brunch.co.kr/@bigmouth/22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루완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태워다 줄 일행들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중간중간에도 현지인들이 매의 눈으로 나의 상태를 계속 살폈다. 언제 소매치기를 당할지, 강도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공항 입구에 사람 많은 곳에서 대기하라던 선발대의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일행을 기다렸다. 몇 번이나 앙골라 현지 택시기사들이 태워다 주겠다며 말을 걸었지만 포르투갈어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기다린 지 1시간 만에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날은 어둑어둑 해졌다. 해가 저물 무렵에나 숙소에 짐을 풀었다. 말이 호텔이지, 조선족이 운영하는 시골 모텔 수준의 숙소였지만, 그래도 오랜 비행시간과, 공항 대기로 지칠 대로 지쳐서 침대에 누울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잠시 앉아서 짐을 풀려던 찰나에 회식이 있으니까 나가자는 말에 옷만 얼른 갈아입고, 다시 루완다 시내로 향했다. 먼저 와있던 선발대와 앙골라 정부에서 마련해준 만찬회였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기억으로 남았다.(하지만 너무 짜서 맥주를 더 많이 먹은 것 같다.)

루완다에서 첫날 먹은 마지막 만찬! 평상시에는 계속 한식을 먹었다...

앙골라에서의 일정은 쉽지 않았다.

우선 겨울이었는데 날씨는 습하고 더웠다. 적도에 가까이 있어서인지 끈적끈적한 날씨가 계속돼서 반팔을 입고 생활해야 했다. 이런 날씨에도 앙골라에서는 길거리에서 빈곤층은 얼어 죽는 일이 많다고 하니 덥고 추운 걸 느끼는 건 사람마다, 나라마다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먹는 건 호텔에 있는 조선족 아주머니가 늘 한식을 제공해줬다. 말이 한식이지 중국음식+김치의 조합이었지만, 냉면도 나오고 나름 먹을만했다. 여행 와서 현지식을 먹고 싶었지만, 첫날을 제외하고는 접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출장기간 동안 가장 많이 먹은 건 맥주였다. 현지에 살고 계신 한국분들 이야기로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을 때 빵이나 맥주 등 먹는 것들을 포르투갈의 제빵과 양조기술을 들여와서 꽤나 맛이 좋다고 했다. 식민지배가 끝난 이후에도 공장시설을 그대로 남겨놓고 가서 맛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실제로 값싼 맥주를 매일 밤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숙소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서 할 일이 없을 때는 바닷가에 앉아서 맥주를 자주 마셨다. 바닷가에 나름 체육시설도 있었고, 해수욕하기에 괜찮은 해변이었지만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녁이면 현지인들이 모여서 음악을 틀어놓고 노는 소리가 가득하지만 해가 완전히 지면 조명시설이 하나도 없어서인지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낮에 축구도 몇 번 했지만 습한 날씨 때문에 금방 탈진하기 일수였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석유파동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앙골라는 아프리카에서도 두 번째로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가 굉장히 큰 나라였다. 석유값이 급락해서인지 앙골라 수도 곳곳에 건설이 중단된 고층건물들이 굉장히 눈에 많이 띄었다. 석유파동으로 공산품의 품귀현상이 일어나서 종이컵이나, 휴지 같은 생필품들을 구하기 힘들었고, 동네 슈퍼마켓 같은 곳에서는 공산품은 동이 나서 구매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물물교환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우리가 가져온 휴지나 종이 등의 생필품을 맥주와 교환했다.) 석유파동이 나고 나서 달러가 귀해지니 큰 액수의 달러들은 거슬러 줄 수가 없어서, 화폐를 종류별로 들고 다니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앙골라에서는 '콴자'를 화폐로 쓰였는데 가치가 하락해서 환전하는 것보다는 달러를 쓰는 게 더 편했다.(앙골라는 화폐 반출이 금지였다.)


앙골라에 방문한 가장 큰 목적은 시스템 설계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앙골라에는 우라 나라처럼 112 신고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나라였다. 통합콜센터에서 신고전화를 받고, 경찰서나 신고지역 근처의 경찰을 조회해서 출동지령을 내리는 시스템(앙골라는 113으로 신고하게 되었다.)에 필요한 플랫폼 설계를 위해 앙골라에 도착했지만 앙골라에 있는 동안 현지 협조가 안돼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앙골라 수도 '루완다' 거리 풍경, 있는 동안 사진을 많이 못 찍었지만 미팅 대기장소가 없어서 길바닥에서 서있는 경우가 많았다.(할 일 없어서 사진 촬영한 것 같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경찰서부터 통신사, 정부 관계자, 개발자 등등 만날 때마다 약속을 펑크 내거나, 노골적으로 로비를 요구하기도 했다. 술자리, 돈 등을 요구했기 때문에 약속된 제시간에 미팅을 해본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 또 일하던 도중에도 점심시간이나 퇴근시간이 되면 말도 없이 사라 기지도 했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서 애를 많이 먹었다.(통역사가 스페인어 전공이어서 포르투갈어를 알아듣긴 했지만,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는 일도 많았다.) 문서작업도 한글작성 → 영어 번역 → 포르투갈어 번역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딜레이가 많이 생기고  말았다. 결국에는 한 달의 출장 일정 동안 업무의 진행이 더 이상 안된다고 판단하고 2주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프로젝트가 중단이 되었다가 재개되었다.(다시 재개되었을 때는 앙골라에 안 좋은 기억들 때문에 출장을 완강히 거부하는 데 성공했다.)  


주말에는 앙골라에 거주하는 타사 직원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7층에 거주했는데,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돈을 내야 했기에 걸어서 중간에 달랑 달라고 할 때마다 곤혹이었다. 처음 방문한 날은 세탁기가 고장 나서 다운타운에 있는 전자상가에 세탁기를 구매하러 따라갔다가 고생만 잔뜩 하고 온 기억이 있다. 매장에는 새 제품은 하나도 없고 전부 중고품에 물건도 몇 개가 없어서 멀쩡하게 돌아가는지만 확인하고 구매를 해야 했고, 배달이 안돼서 업무용 트럭에 싣고 숙소에 내린 후 7층까지 계단으로 들고 올라간 기억이 떠오른다. 그만큼 내가 앙골라에 갔을 때에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숙소에서 사무실까지 매일 출퇴근을 시켜줬던 드라이버가 앙골라 시내를 구경시켜주기도 했다.(개발자 출신인데 운전하는 게 돈을 더 벌어서 직업을 바꿨다고 한다.) 앙골라는 특히 농구가 인기가 많았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양 팀의 서포터들이 악기를 들고 행진을 하며, 팀을 응원하는 게 볼만했다.


그리고 다운타운을 걷고 있으면 앙골라 현지인들의 눈초리가 굉장히 따가웠었는데 중국인에 대한 아시안 혐오가 굉장히 높을 때여서 거리를 걷거나 밤 중에 우리끼리만 돌아다는 건 자제해야 했다. 앙골라에서 특히 중국인들이 많았는데, 중국이 아프리카에 수많은 국가사업에 참여하면서 중국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들어왔고  이 때문에 앙골라 현지인들의 일자리가 줄어들어서 불만이 많다고 들었다.(입국/출국할 때 비행기 안의 대부분 사람이 중국사람이었다.) 중국의 명절인 춘절에는 고행을 가려는 중국인들 때문에 공항이 아예 마비가 될 정도였다고 하니 굉장히 많은 중국사람들이 앙골라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단축된 출장으로 급히 비행기 표를 예매해서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제는 숙소의 녹물과 모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지만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한참을 앚아있을 생각을 하니 짐을 싸면서도 피로가 쌓인 기분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체면치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