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애쉬즈 / 아시아 단편 컬렉션)
너무나도 사랑했던 첫사랑과 이별한 뒤 삶이 삶 같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 크리스티안.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거칠어지고, 매일 같이 데이팅 앱을 이용해 충동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어떻게든 상실의 아픔을 달래보고자 한다. 하지만, 마치 오래된 물건에 달라 붙은 먼지처럼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옛 연인의 추억은 좀처럼 곁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데이팅 앱에 접속하며 매번 다른 남자를 만나고, 관계를 갖지만 진정한 사랑을 시작할 수는 없다. 그러던 중 크리스티안은 우연히 어플에서 헤어진 연인 아스커를 발견하게 되고, 그동안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결국 끊어져버리고 만다.
크리스티안이 이성을 잃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전 애인이 잠수이별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기 때문일 터. 영문도 모르는 상태로 상대가 갑작스레 따로 시간을 갖자며 통보식 이별을 고해버렸으니, 열이 뻗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갈만하다. 하지만, 이같은 속사정을 감안하더라도 크리스티안의 행동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버린다. 그는 타인의 사진을 도용해 아스커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고, 스토킹으로 주소를 알아내는 것은 물론, 대담한 연기로 그의 앞에 나타나기까지 한다.
크리스티안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견디고 있는 자신과 달리 그의 존재 따위 잊은 채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는 듯한 옛 애인을 보며 뒤늦게라도 그의 인생을 흔들어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집착이 심해질수록 더 큰 통증만이 그에게 돌아올 뿐이다. 그 남자를 다시 붙잡는다고, 그의 인생에 다시 내 존재를 들이 밀어넣는다고, 이제 와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크리스티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의 이성이 해묵은 감정들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다.
이미 끝나버린 관계를 애써 붙잡고 싶을 때가 있다. 이는 극중 인물처럼 연인 관계에 적용될 때가 많지만, 꼭 '사랑'으로만 해석되는 감정만은 아닌 것 같다. 모든 관계에는 끝이 존재할 수 있기에, 어떠한 관계를 대입해도 충분히 성립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관계의 끝을 직감했을 때, 누군가는 그 순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반면 누군가는 명확한 납득이 이뤄질 때까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러한 타이밍의 균열이 발생할 때, 후자는 반드시 뼈아픈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납득이라는 개념은 상대방이 정확한 연유를 설명해줄 경우 완성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크리스티안의 구 남친이 깔끔한 이별을 고했다면, 그는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서로의 감정이 끝나는 시기가 다르다면, 이러한 과정과는 별개로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을까.
크리스티안의 첫사랑은 끝내 파국으로 치닫지만, 영화는 의외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새로운 상대를 만나 가족들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크리스티안의 미소로. 인생이 끝날 것만 같았던 소용돌이를 맞게 되더라도, 그 또한 새로운 관계로 극복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까? 가장 소중한 관계가 허탈하게 끝나더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사랑이 나타날 수 있으니 자신을 너무 벼랑 끝으로 내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남기는 건가 싶었다. (다소 성급하게 이뤄진 듯한 엔딩은 조금 아쉬웠다.)
오후 다섯 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세이지는 핑크빛으로 물든 하늘과 고즈넉한 동네의 풍경을 차분히 감상한다. 그의 옆에서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같이 풍경을 보고 있던 한 남자. 스치듯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세이지는 그에게서 어떠한 시그널을 느낀 듯하다.
그러나 얼마 후, 세이지는 우연히 뉴스에서 그 남자의 실종 소식을 접한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는 바로 그와 함께 종소리를 들었던 도로 앞. 그때부터 세이지는 무언가에 홀린 듯 실종된 남자의 마지막 행적을 좇는다. 그와 말 한 마디 제대로 섞어보지 않았음에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세이지는 그를 마주친 순간 어쩌면 그와 연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많은 기혼자들이 말하곤 하는 첫눈에 '이 사람과 결혼할 것 같다'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아직 시작도 해보지도 못한 관계가 상대방의 실종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린다면? 나 같아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설령 상대와 아직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가 이미 내 마음 속에 들어온 상황이라면 그 감정은 결코 0으로 표현될 수 없을 테니까.
<다섯 시의 종소리>는 어느 날 내 세상에 훅- 들어온 사람의 실종 소식을 접했을 때, "우린 과연 어디까지 행동할 수 있을까"를 극적으로 가정해서 풀어본 이야기 같다. 10분을 약간 넘는 단편이라 이야기가 매우 함축적이지만, 이미 상상을 통해 상대와 끝까지 가본 상태라면 마치 그가 나의 연인이나 친구라도 되는 듯 마지막 행적을 어떻게든 쫓고 싶지 않을까. 현실인지 꿈인지 인지 능력을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상상이었다면, 더욱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세이지는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져버린 그 남자를 끝내 찾지 못할 것이다. 함께 다섯 시의 종소리를 듣던 그 순간, 한 마디라도 더 걸어보지 못한 것, 아주 사소한 연결고리조차 만들지 못한 것을 한동안 후회할 것이다. 어쩌면 오후 다섯 시가 될 때마다 실종된 그 남자를 떠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시작된 것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의 자책이 아주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늦은 밤, 예술가 마두가 한 중년 남자가 끄는 릭샤(인도의 택시)에 오른다. 트랜스여성 혹은 논바이너리인 듯한 마두는 그 자체만으로 신비로운 비주얼의 소유자이며, 그가 택시에 오르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운전수는 현재 순례를 앞두고 한 달간 금욕을 지키고 있던 상황. 그런 그에게서 호기심을 느낀 건지 마두는 유혹하듯 운전수를 자극하고, 그 매혹적인 자태에 깊은 신앙심은 흔들리게 된다.
'오토매직'이란 건, '택시(auto-)'에서 벌어진 마법 같던 짧은 순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두 사람이 올라탄 택시는 마치 현실과 분리된 공간인 것처럼 시간의 속도가 천천히 흐르고, 도시의 소음과 분리된 듯 적막이 흐르며, 이들이 멈춰 있던 곳에만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다 지나간다. 평범한 도시 속 오직 두 사람이 존재하는 작은 택시라는 공간만이 마치 다른 차원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 시공간은 '마법'이라는 단어와 무척 잘 어울린다. 신실한 집안 출신의 운전수에게 마두라는 인물 또한 마법 같은 존재나 마찬가지이다. 남성이기도, 여성이기도 한 그는 분명 운전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에게 마법처럼 낯선 존재임이 틀림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운전수가 택시에 매혹적인 손님 하나를 태우고 집으로 데려다주던 찰나의 순간은 엄청난 마법에 홀린 듯한 경험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한 가지 흥미로웠던 건 꽤 보수적일 것처럼 보이는 중년의 운전수가 마두를 향해 행색을 두고 훈수를 두거나 욕짓거리를 쏟아붓는 게 아닌, 진심 어린 걱정을 하고 차분하게 그와 대화를 이어나갔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보통의 중년 남성, 특히 '인도'라는 그의 모든 배경 요소를 고려했을 때 그 역시 전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적당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신선함이 느껴졌던 건 이같은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운전수의 반응이 끝에 더해짐으로써 이 영화의 '마법' 같은 장면들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키노라이츠로부터 초대권을 받아 영화제에 참석 후 솔직하게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