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홍상수 영화 세 편으로 써 보는 영화 에세이
한창 영화 비평 학회 활동을 할 때 홍상수 영화를 본 적 있다. 학회 차원에서 본건 아니고 그냥 혼자 봤다. 나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영화를 한 번쯤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호기롭게 <풀잎들>을 골랐지만, 영화 시작 삼십여 분 만에 잠들고 말았다. 색 빠진 흑백 화면에 나긋한 김민희의 육성 그리고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지루했다. 상투적 상업영화의 문법에 길들여진 내게 그의 영화는 예술을 넘어 실험적으로 다가왔다. 때마침 그의 윤리성도 대중의 질타를 받고 있었다. 그때 나는 다시는 그의 영화를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얼마 전 집에서 <북촌방향>을 봤다. 느지막이 열한 시쯤 스스로 일어나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파스타를 만들어 먹은 날이다. 이번엔 페퍼론치노 넣는 걸 깜빡 잊었지만 다행히도 딱 기분 좋은 정도의 느끼함이 입술에 맴돌았다. 식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멎어갈 때 즈음엔 집 안에 고요한 적막이 남았다. 거실로 향하니 불을 켜지 않아도 집이 밝았다. 우리 집은 오후 두시쯤 거실 창가에 볕이 든다. 특히 아빠가 가꾸는 난초 허브 화분 위에 태양광이 쬐오면 참 예쁘다. 소파에 누워서 그걸 보고 있자니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산책한 듯 몸이 뿌듯해졌고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별안간 홍상수 영화가 떠올랐다.
<북촌방향>도 흑백 영화다. 간간이 클래식 음악도 등장한다. 유준상 배우가 왼손 한 달, 오른손 한 달, 양손 한 달. 총 석 달 연습한 피아노 곡 쇼팽의 녹턴 20번이 기억에 남는다. 마찬가지로 극적인 클라이맥스 없이 잔잔한 영화다. 이번엔 배도 부르고 몸도 따스했지만 조금 나른할 뿐 지루하지 않았다. 두 눈은 영화 속 공간, 대화하는 인물, 카메라의 움직임을 쫓아가기 바빴다.
그때부터 다시 그의 영화에 주목했다.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사는, 찌질하고 무책임한 남자가 등장하는 영화. 사랑과 욕망에 솔직하다 못해 노골적인 영화. 감독 그 자신의 생각, 고뇌, 감정이 솔직하게 다듬어진 문장으로 배출되는 영화. 무엇보다도 난 영화가 담아내는 공간이 좋다. (북촌, 서촌, 수원 행궁같이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곳에서는 누가 어떤 말을 내뱉어도 의미 있고 있어 보이기 마련이다.) 물론 아직도 예술영화 특유의 거리감에 갈 길이 멀고 낯설기도 하지만 좁혀 보려 애쓰는 중이다. 그 노력이 즐겁다.
어젯밤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봤다. 마찬가지로 극 중 남자 주인공은 정말 찌질했다. 그래서 하정우 배우가 한 번 홍상수 작품에 나와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정말로 까맣고 앙상한 그가 나왔다. 맛있는 김치 나눠주러 왔다가 불륜 현장을 목격한 그 참담한 표정이 참 재밌었다. 그리고 찌질하고 보잘것없는 남주(김태우 배우) - 홍상수 감독의 찌질남 페르소나 중 한 명-에 비해 고현정 배우가 내뱉는 아우라가 너무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낯선 영화에 낯익은 얼굴들.
오늘은 <풀잎들>을 봤다. 지루함에 눈을 감고, 다시는 홍상수 영화를 보지 않겠다 다짐하게 만든 바로 그 영화. 이번엔 달랐다. 작품을 다 보고 김민희 배우의 독백을 다시 틀었다. 두어 번 돌려 계속 봤다. 그리고 직접 펜으로 적어내려 또 한 번 스며들게 했다. 일상의 단편을 영화로 옮기고 투박한 일기를 대사로 다듬어 보인다는 게 이런 걸까? 매일 느끼는 감정과 내뱉는 말을 좀 더 풍부하게하고 섬세하게 기억해야겠다. 그리고 영화 속 모든 장치를 문법대로 해석하려 들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오롯이 마음으로 와 닿아 느끼는 것 그 자체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풀잎들>은 주고받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개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객관적이고자 노력한다. 감정을 등한시하고 저 멀리 밀어내려 하지만 결국 사람을 자주 바꾸는 건 감정이다. 지루함을 이유로 안목과 취향에 벽을 세운 내가 마음이 움직여 스스로 벽을 거둬냈듯 말이다. 그 정념을 다시금 되새겼다. 홍상수 영화를 통해 느낀 건 감정이지 어떤 교훈이나 울림이 아니다. 낯섦에 내외하던 화면 속에서 성큼 마음으로 다가왔던 대사를 또 한 번 읊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