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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폭의 영화처럼 Oct 06. 2020

아주 통쾌한 복수극을 봤다

[영화 리뷰 에세이] 키스가 죄(2019)

아버지가 잠든 딸의 머리칼을 거칠게 움켜쥔다. 콧바람에 풍기는 술 냄새가 지독하다. 다른 한 손엔 부엌 가위가 들려 있다. 서걱서걱 - 무딘 가윗날에 곱게 기른 머리칼이 무식하게도 잘려 나간다. 그러나 딸은 겨우 두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알싸한 공기에 어떤 소리도 낼 수 없다. 아무 저항할 수 없다. 억한 심정에 굴욕감이 들지만 이내 이불자락에 꽉 쥔 주먹을 숨긴다. 그리고 지난밤 황홀했던 순간을 탓하기 시작한다. 키스를 한 게, 또 키스의 흔적을 몸에 선명히 남긴 게 소녀의 죄악이었다.




일곱 살의 나는 동생과 자주 다퉜다. 누구 하나 울어야 끝을 봤다. 그때마다 우리는 "계속 싸우면 둘 다 동아줄로 꽁꽁 묶어서 학의천에 던져 버릴 거야"라는 웃픈 협박을 듣곤 했다. 하지만 정말로 학의천에 던져질까 무서워 싸움을 멈춘 적은 없다. '이번엔 좋게 말로 타이르지만 다음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라는 속뜻이 두려웠을 뿐. 이 외에도 팬티 바람으로 집 밖으로 쫓아낸다거나, 머리를 싹 잘라버린다거나. 남의 시선 끝에서 느낄 수치심이 자기반성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류의 협박을 몇 번 들었다. 다행히도 나는 눈치껏 잘못을 잘 뉘우쳤고, 부모님도 무턱대고 무식한 체벌을 내게 가하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참 잔인한 말이다. 정말로 발가 벗겨져 집 밖에 쫓겨났거나, 머리를 뎅강 잘리는 체벌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지금만큼 우리 부모님을 신뢰하고 존경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아무리 신체발부 수지부모라지만, 역으로 부모가 자식의 터럭을 손상시킬 권리도 없다. 단지 훈육이란 이름으로 자녀의 신체를 협박의 볼모로 삼고 처벌하는 건 부모 역할을 남용하는 폭력이다.

 

앞서 언급한 술 취한 아버지에게 머리가 잘린 딸은 <키스가 죄>(2019) 속 혜복이다. 이 사건은 혜복이 더 이상 아버지의 폭력을 참지 않고, 한나와 함께 복수를 다짐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영화에는 그 부분에 대한 묘사가 없다. 그저 혜복의 입을 통해 담담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혜복은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잠시나마 혜복이 되어 그가 겪었던 가정 폭력의 순간을 좀 더 솔직한 글로 대신 적어 봤다. 한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애써 포장해 내보였을 깊은 상처를 감히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영화 <키스가 죄>(2019)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아버지가 행해 온 가부장적 권위와 폭력에 대한 복수가 되겠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복수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존 윅> 시리즈의 피 튀기고 잔인한 폭력이 아니다. 오히려 <톰과 제리> 식의 귀엽고 발칙한, 동시에 어딘가 허접한 복수극이다. 화장실 바닥에 비누칠 하기, 장판에 참기름 바르기, 의자 다리 분지르기...  누가 됐든 이 복수의 대상은 아픔보다 창피함을 더 크게 느낄 것이다. 한나와 혜복이 도모한 복수의 목적은 - 물론 순간 눈이 뒤집혀 "죽여버리자"라는 매서운 말을 내뱉긴 했지만 - 적당히 몸 어디 하나 상하는 선에서 아버지의 같잖은 권위를 떨어뜨리는 데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같잖은' 권위는 다음 발화에서 너무나도 잘 나타난다.  

한나    여기 혜복이 집 맞죠?
정근    아니. 내 집인데.
한나    혜복이 무슨 일 있죠. 폰이 안 되던데.
정근    왜 그렇게 봐. 고장 났다. 변기에 빠졌다. 너 자주 다치지? 너처럼 까불면 잘 다치거든.
한나    되게 듣던 대로시네요.

정상적이고 성숙한 대화라고 볼 수 없다. 차라리 유치한 기싸움에 가깝다. 상대를 불신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공격적인 발화에 만연히 드러난다. 특히 정근은 '미성년 - 성인', 정확히는 '여고생(소녀) - 성인 남성'이라는 수직적 관계를 과시하며 한나를 겁주고 있다. 자신의 거대한 몸집, 세 배는 더 먹은 나이, 그리고 아버지라는 남성의 지위를 방패 삼아 한나가 자신의 집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고 한나가 마음대로 겁먹지 않자 이내 문을 억지로 쾅 닫아버리며 물리적으로 그를 내쫓는다. 정말 듣던 대로 정근은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였다. 하지만 한나는 굴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혜복을 구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수풀 속에서 콜라에 족발을 뜯으며, 산불 경비인 정근이 밤에 집을 나설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한 혜복의 몰골에 큰 분노를 느낀다.


혜복이 겪은 두 사건 때문이다. 밤바다의 이름 모를 남학생이 목에 남긴 키스마크, 그리고 아버지가 잘라 버린 머리카락. 어떤 형태로든 두 경험 모두 혜복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고, 일상생활을 중단케 했다. 물론 혜복도 가만히 있기만 한건 아니다. 비록 정근의 만행에는 아무 저항하지 못했지만 남학생 목에는 똑같이 키스마크를 남겼다. 하지만 그 남학생은 강제로 머리가 빡빡 깎이거나,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집에 갇히지 않았다. "걔네한테는 자랑이지"라는 혜복의 대사처럼, 자랑거리일 뿐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로 같은 행동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쪽만 잔인한 대가를 치렀다.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상황이 두 소녀의 복수심을 불태웠다.

 

결과적으로 정작 그들이 불태운 건 따로 있었다. 일단 허접한 복수 작전은 모두 실패로 막을 내렸다. 성공할 리가 있나. 아쉽지만 이성적 판단과 치밀한 계획이 복수의 필수조건이라는 걸 깨닫기엔 너무 늦었다. 망연자실한 혜복과 한나. 이윽고 그들은 복수를 빙자한 일탈을 시도한다. 한나는 담배 한 개비를 혜복 손에 쥐이며 “니 몸 상하게 하는 것도 여러모로 복수야”라고 말한다. 참 순진무구한 말이다. 정근은 부성애가 결여된 인물이다. 적어도 20분 남짓한 이 영화에선 그렇다. 혜복 머리를 자른 이유도 딸이 엇나가는 걸 막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정근이 과연 혜복이 아프다고 온 마음 다해 과거의 만행을 뉘우칠까? 순간 불효를 빌미로 제 몸 성하게 하는 건 아주 미련한 방법이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직 아버지를 믿고 있는 그 순수함에 마음이 아팠다.


한나의 권유에 혜복은 담배 내음을 킁킁대다 불 붙여 한 모금 들이킨다. 자욱한 연기에 한껏 용감해진다. 미성년자에게 키스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듯 흡연 또한 10대에겐 하나의 터부(taboo)다. 그리고 넘지 못하게 높이 세운 울타리를 몰래 넘어가는 건 그 나이 때가 흔히 자신의 용맹함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혜복은 자신에게 걸려 있던 하나의 족쇄를 풀었다는 데 잠시나마 용기와 자유를 얻었던 게 분명하다. 발각될 경우 잔인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불안한 자유를 말이다. 불효가 복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근거 없는 용기를 얻은 혜복이 참 순진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 어쭙잖은 복수 흉내는 담뱃재가 닭장에 옮겨 붙어 불이 나는 사고로 이어지고 만다. 당황한 한나와 혜복은 허둥지둥 불을 끈다. 다시 남은 건 허탈함 뿐. 결국 둘은 밤바다로 향한다. 바깥으로 향해 있던 앙금의 화살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든든한 친구와 함께, 자신만의 비밀 공간으로 떠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다. 그리고 두 소녀 뒤로 산불이 조금씩 번져 나간다.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산불 경비'와 '방화'가 이루는 개연성을 통해 영화의 결말을 충분히 예상했을 거다. 하지만 한나와 혜복은 산불 경비 정근에게 가장 치명적인 복수가 방화라는 것 까진 계산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더 통쾌하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결국 완벽한 복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누가 불을 질렀는가에 대한 해석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 결과 자체에 대해서는 깔끔하다는 평이 많다. 나도 찬성하는 바다.

   

사람들은 대개 헐어버린 몸을, 정신을, 마음을 보듬고자 복수를 선택한다. 따라서 복수는 곪아버린 상처에 대한 위로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 복수극은 상처를 지닌 주인공이 치밀한 계획과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데 집중했다. 안타깝게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방식은 주인공 본인의 상처를 완전히 감싸주지 못한다. 간단한 논리지만 종국에는 똑같은 사람이 돼 버리기 마련이다. <친절한 금자 씨>(2005)에서 금자가 복수에 성공한 뒤 지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떠올려 본다. 기쁜 듯, 슬픈 듯. 통쾌하면서도 찝찝하다고, 각자 다른 감정을 말하고 있는 금자의 눈과 입. 온갖 심정이 뒤섞여 감히 공감조차 할 수 없다. 마음 한 구석 불편한 복수는 성공한 복수라 말할 수 없다.


이번엔 영화 결말 뒤 이야기를 상상해 본다. 밤바다에서 돌아온 혜복과 한나는 얼떨결에 성공한 복수에 떨떠름해하다가도 산불 경비직을 박탈당한 정근을 보며 킥킥댈지 모른다. 혹은 산불에 집까지 불타 없어져 오히려 우울함이 더 커질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혜복의 밉게 잘린 머리가 다시 곱게 자라나고, 선명했던 키스마크에 든 피멍이 노랗게, 그리고 곧 살색으로 스며들 것이다. 언젠가 둘이 정말 어른이 되면 한 번쯤 이 불장난을 안주삼아 되새김질하지 않을까. 순수하고도 귀여웠던 둘의 우정에 감탄하다가, 무식했던 아버지를 잔뜩 씹어 보다가. 키스마크 남기고 간 그 남학생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살지 문득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키스가 죄가 아니었다는 걸 재차 깨닫게 될 것이다. 마치 정근의 등에 커다란 부황 자국이 빼곡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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