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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폭의 영화처럼 Oct 07. 2020

잠수하는 기억들

[여행 에세이] 잠시 꺼내 곱게 말리기

0.

무더운 여름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속옷이 땀으로 젖어왔다. 이따금 남몰래 손으로 튕겨 바람을 흘려보냈다. 우리는 한낮 더위를 피해 카페로 모여들었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크게 빨아 재꼈다. 잠시 정적. 정수리가 차갑게 식어갈 때 즈음 여행 이야기가 시작됐다. 너 나 할 것 없이 저가 항공사 땡처리 항공편을 시끄럽게 뒤졌다. 가난한 대학생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이열치열. 어쩔 수 없지 - 하고 아쉬워하면서도 입가엔 웃음이 비실댔다. 이년 전 여름, 우리는 그렇게 대만으로 향했다.


우리는 자타공인 죽이 잘 맞는 여행 메이트다. 당시 중국어를 나름 유창하게 구사하던 나는 언어-소통 담당을, 미각이 뛰어난 A는 맛집 검색을. 경제관념이 투철한 B는 총무를 맡았다. 셋 다 공통적으로 자유분방한 입맛과 우유부단한 결단력을 지녔다. 덕분에 보통의 그곳 날씨처럼 여유로운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다툼도 없었다. 세 명이서 한 방을 잡을 때는 보통 더블 배드 하나와 싱글베드 하나를 준다. 싸우면 좁은 침대에서 둘이 살 맞대고 부대끼며 자야 한다는 끔찍한 규칙이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타지에서 누구 하나 상처 입어 돌아오는 불상사를 막았다.


1.

나는 비행기를 오르내릴 때 코를 킁킁대는 버릇이 있다. 미세한, 혹은 완전히 낯선 공기의 차이를 직접 느끼고 싶어서다. 하늘 한가운데서 맡아보는 공기 내음은 기분 좋게 비릿하다. 그래서 일부로 한 움큼 들이마셔도 보고, 코를 막고 팽 내쉬며 멍멍한 귀를 뚫어도 본다. 몇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새로운 육지를 밟을 때의 공기는 언제나 낯설다. 대만의 공기는 따뜻하고 축축했다. 벌써부터 중화요리 특유의 향내를 맡은 듯 알싸한 맛도 났다. 그리고 타지에서의 첫 숨은 우리에게 막연한 용감함을 불어넣었다. 주어진 나흘의 시간을 누구보다 잘 보낼 거란 자신감이 차올랐다.


1-1.

하지만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날씨 때문이다. 그때 대만에는 58년 만에 초강력 태풍이 불어왔다. 대만의 첫 공기가 축축했던 건 열대지방 특유의 후덥지근함이 아닌, 곧 불어올 태풍 때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는 겁 없고 용감한 스물한 살이었다. 우산 가져가라는 엄마 말 듣길 잘했다고 좋아했다. 그렇게 넘치는 의욕을 덜어 보고자 중정기념당으로 향했다.


그 길도 순탄치 않았다. 퇴근 시간 지옥철에서 몸을 웅크리다 역을 지나쳤고, 낯선 플랫폼에서 의도치 않게 실컷 사람 구경을 했다. 와중에 A는 교통카드를 잃어버렸다. 여행이 그렇지 뭐. 카드를 한 번 찾아보겠다는 A를 뒤로 하고 B와 중정기념당으로 먼저 향했다. 정말이지 광장에 개미 한 마리 없었다. <트루먼 쇼> 속 트루먼이 된 기분으로 유일한 관광객인 서로의 사진을 찍었다. 결국 비바람에 떠밀려 맞은편 공연장으로 몸을 피했다. 운영 시간이 끝났는지 문이 잠겨있었다. 어쩔 수 없이 노란 지붕 밑에서, 괜히 빨간 기둥을 손으로 짚어대며 이곳저곳 눈에 담고 있을 때였다. 구석에서 한 서양인이 혼자 쿵후 동작을 연습하는 걸 발견했다. 손 끝과 눈빛이 비장했다. 동양의 전통 무술을 배우러 온 고독한 수련자인가? 철없는 호기심에 그의 동작을 몰래 따라 했다. 뒤늦게 빈 손으로 돌아와 풀이 죽은 A에게도 연습한 쿵후 동작을 보여줬다. 별안간 모두 비 속에서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깔깔깔. 한 문장 한 문장 기억을 다듬어 적어보니 영화 같은 순간이다. 소중하고, 그립고, 꺼내 보기 좋다.


1-2.

밤이 되자 본격적으로 태풍이 불어 재꼈다. 우리는 우리의 밤을 호텔 안에서만 보낼 수 없다며, 굳이 예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잠깐 내리다 그치는 소나기라고 말하면서 -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 우산을 나눠 쓰고 까르푸로 향했다. 당연히 태풍의 세찬 빗줄기는 우산으로 차마 막을 수 없었고 저녁 8시 남짓한 길거리엔 사람 한 명 없었다. 이십 여분을 외롭게 걸으며 '여기 사람들은 되게 일찍 자나 보다, ' 하고 생각했다. 가까스로 어디 조난된 사람의 몰골로 까르푸에 도착했다. 마실 것과 먹을 것, 간단한 기념품을 사고 나오자 빗줄기는 더 세차 졌다. 모험은 잠시 뒤로 하고 택시를 잡아 탔다. 지친 마음과 젖은 몸에 말이 없었다. 정적을 깨고 택시 기사 아저씨께서 먼저 말을 걸어오셨다. 중국어 회화 능력 향상을 빌미로 내가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 내릴 때 즈음 기사 아저씨께서 첫 여행인데, 날씨가 좋지 않아 유감이라며 심심한 위로를 해 주셨다. 그 한마디에 우리는 "여기 사람들 참 좋다, " 하며 빗물에 번진 화장을 손등으로 쓱 닦아냈다. 귀도 마음도 얇아서 다행이다.


2.

간 밤에 불어온 태풍은 여행 계획을 처참히 무너뜨렸다. 우선 다들 다녀온다는 예류 지질공원, 진과스를 가볍게 포기했다. 스펀에서는 겨우 풍등을 띄울 수 있었지만, 우중충한 하늘 속으로 정신없이 사라지는 그 모습이 꽤나 을씨년스러웠다. 혹여나 비 웅덩이에 비탈진 골목에서 미끄러질까. 경치 좋다는 지우펀에서도 모든 신경을 발 끝에 곤두세우고 걸었던 기억만 난다. 정신없이 허무하게 투어가 끝나 버렸다. 그래, 우린 먹으면 힘이 나지. 기대의 끈을 끝까지 놓지 못한 채 만두가 맛있기로 유명한 식당 앞에 내렸다. 태풍 때문에 영업을 조기 종료한다고 막 문을 닫던 참이었다. 잔인하게도 배고픈 관광객을 받아주진 않았다. 되는 일도 없고 날씨 복도 없다. 배가 고프면 신경이 예민해지는 우리는 튀어나오려는 모난 말을 겨우 삼키며 여기저기 낯선 골목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그동안 먹구름에 가려진 해가 눈치 없이 지고 있었고, 우산 쓰기가 머쓱한 정도의 부슬비가 내렸다. 우리 꼴이 한 층 더 처량해졌다.


2-1.

와중에 A가 새로운 음식점을 찾았다. 구석진 골목에 있는 식당이었고 A는 길치였다. 알지 못해 똑같아 보이는 골목을 몇 차례 기웃댔다. "화내면 안 돼. 싸우면 알지?" B가 내게 와 넌지시 말했다. 몰래 욕 대신 한숨이라도 내뱉으려고 고개를 돌리던 참이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습한 공기를 다시금 크게 들이켰다. 허파가 크게 부풀어 오르면서 몸속 깊이 이슬이 가득 맺혔다. 비릿하게 젖은 흙냄새와 꼬릿한 향신료 내음도 섞여 들어왔다. 꼬르르- 때마침 텅 빈 장기가 우렁찬 굉음을 냈다. 습도가 너무 높으면 조금만 뛰어도 물에 잠긴 것 마냥 숨이 찬다던데. 순간 잠수하는 기분이 들었다. 적당히 따뜻한 물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이국적이고 좁은 골목 사이를 애써 걷는 느낌. 읽을 수 없는 번체자 간판 사이로 보이는 주황색 하늘이 오묘했다. 그리고 털레털레 앞장서 걸어가는 A의 뒷모습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실실 나왔다. "쟤 실성했나 봐. 다 왔어 이제." 골목 끝에 보이는 식당으로 헐레벌떡 들어가는 두 친구를 괜히 뜀박질로 따라갔다. 물놀이 끝내고 먹는 밥은 언제나 맛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곳을 용케 찾아온 외지인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여러 눈빛 속에서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빗물 젖은 계란 볶음밥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물기 가득한 주황빛 골목

3.

남은 이틀은 모두 맑았다. 더 이상 잠수하는 경험을 하지 않았다. 물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강한 햇볕에 공기 중에 부유하던 증기가 흔적 없이 모두 사라졌다. 간혹 맑은 하늘에 소나기가 내리곤 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우산을 쓰지 않았다. 잠깐 내리는 비는 시원한 카페에 들어갈 좋은 핑계가 되었다. 그리고 푸른 하늘도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맹렬한 더위에 모두들 쉽게 지쳤다. 나는 촌스러워 쓰지 않겠다던 밀짚모자를 스스로 꺼내 썼다.


3-1.

풍겨오는 취두부 냄새에 코를 잡아 비틀었다. 그 냄새가 궁금하다던 B는 자신의 호기심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야시장엔 푼 돈 쓸 거리가 많았다. 우리 셋은 두둑한 동전지갑을 짤랑대며 전형적인 관광객 행세를 했다. 흥정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어보며 눈과 입을 채웠다. 오락에 영 재능이 없는 나는 돈을 잃기 일쑤였다. 반면 승부욕 강한 A는 앉은자리에서 꽤 좋은 상품을 곧잘 따 냈다. B는 이 돈을 오늘 모두 다 써야 한다며, 집중하는 A 옆에 동전을 수북이 올려놨다. 나는 할 줄도 모르는 마작을 하며 대만 아저씨와 수다를 떨었다. 못 알아 들어도 아는 척 웃어 보였다. 그런 우리가 귀여웠는지 아저씨가 주전부리를 양 손 가득 쥐어주셨다. 이것저것 기웃대며 몇 시간 동안 시장 거리를 거닐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맥주와 과일을 샀다. 과일가게 아저씨가 대만에서 제일 맛있는 과일이라며 용과를 선뜻 추천해 주셨다. 푸짐한 과일을 안주삼아 맥주 일곱 캔을 A와 나 둘이 다 마셨다. B는 취기가 오른 우리 둘을 귀찮다는 듯 더블 베드로 밀어 넣었다. 서로 원치 않는 온기를 느끼며 깔깔대다 곤잠에 빠졌다. 다음 날 발목이 무척이나 뻐근했다.

A가 따 낸 페파 피그 인형들.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가졌다.

4.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아침 비행기를 기다리는 내내 혼자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A와 B가 망고 때문이라며, 애써 들고 온 망고를 버리라고 말했다. 너무 단호해서 공항에서 먹겠다고 기어이 들고 온 망고를 다 버리고 말았다. 아깝기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컸다. 탐스러운 황금빛의 망고들. 과유불급의 논리를 화장실에서 다시 배웠다.   


5.

오늘 A에게 대만 여행 에세이를 쓰고 있다 말했다. 태풍밖에 기억이 안 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맞아, 태풍 이야기를 쓰고 있어. 정말이지 돌이켜보면 극악무도했던 날씨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태풍, 습도, 땡볕 더위. 우린 그곳에서 말 그대로 질풍노도를 겪었다. 지금도 셋이 한 자리에 모인 날이면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여행을 영웅담처럼 늘어놓는다. 습기가 불쾌지수를 결정하는 척도라지만, 그때의 꿉꿉한 날씨가 그리울 뿐이다. 지치고 힘든 와중에 낭만을 찾았나 보다. 그래서인지 언젠가 다시 대만에 가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곳이 많다고 날씨 탓을 해 보겠다. 여전히 낯설게 느껴질 공기를 한 입 크게 마시고 싶다. 다시 가 본다면 깊은 곳에 고요히 잠겨 있는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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