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종합상사에 다니세요?

종합상사를 원했던 과거의 나, 그리고 종합상사에 다니는 지금의 나

by 나수라

내 전공을 활용할 수 있는 곳

스스로가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는 곳

돈을 많이 주는 곳.


몇 년 전에 세웠던 내가 가고 싶은 직장의 기준 세 가지이다.


종합상사는 어문계열을 우대했다. 대학에서 유럽어를 전공한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고, 업무를 하며 내 언어 실력을 발휘하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종합상사에서는 사원·대리급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다고 했다. 확실히 저연차가 배울 게 많은 회사라는 평이 많았다. 회사 업무를 하는 것만으로 자기 계발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 돈을 많이 준다고 했다.


그래서 난 종합상사에 지원했다. 그리고 지금 N년째 종합상사에서 해외영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종합상사는 없다.


결국 메일은 영어로 쓴다.

내가 전공한 외국어로 거래선들과 비즈니스를 진행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내 거래 상대는 우리 회사 해외 지사 글로벌 스탭과 주재원이다. 글로벌 스탭에게 현지 외국어로 메일을 쓰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참조에 들어가 있는 내 전공 유럽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 팀장·차장·과장을 보며 결국 난 영어로 된 메일을 쓴다. 오늘도 내 전공인 외국어를 활용하지 못했다.


물론, 중국어 전공자라면 중국어 쓸 일이 엄청나게 많다.


자기 계발은 퇴근 후, 부지런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저연차한테 권한도 많이 주어지고, 업무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게 많은 곳이다. 매일같이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가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면서 내공이 쌓이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회사 업무와 자기 계발은 별개다. 파이썬을 배우든, 회계를 공부하든, 제3외국어를 배우든 자기 계발은 퇴근 후 자기 시간을 써야 얻을 수 있는 열매다. 회사 업무에 지친 나는 퇴근 후 침대에 누워 유튜브만 볼뿐이다. 회사가 자기 계발까지 시켜주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유없이 돈을 많이 주는 곳은 없다.

꽤 많이 준다. 웬만한 대기업에서도 이 정도 월급 맞춰주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이직한 동기들의 전언이다.


회사는 바보가 아니다. 돈을 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종합상사는 사람이 곧 자산이고, 제조업에서 공장을 돌릴 때 종합상사에서는 사람을 돌린다. 퇴근 후 카톡 메시지에 "Hello", "Dear, Mr..."같은 메시지가 뜰 때마다 '오늘은 또 무슨 사고가 터져서 나에게 굳이 이 시간에 연락하는 걸까'하는 생각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선다. 납기를 맞춰야 하는데, 내 마음도 몰라주고 배는 출항 지연된다. 배는 잡아놨는데, 바이어에게서 LC는 오지 않고, 메이커는 오더 없냐고 계속 전화해서 쪼아댄다. 이것저것 내 잘못도 아닌데 스트레스받는 일의 연속이다. 매일 스트레스를 견디는 값, 그게 돈을 많이 받는 이유다.



왜 계속 종합상사에 다니세요? - 결국, 돈 때문에요.


내가 생각했던 세 가지 기준 중 두 가지나 부합하지 못하지만 나는 계속 종합상사를 다닌다. 이 회사가 주는 돈을 포기하기에는, 나에겐 큰 금액이었다. 만약 내가 스트레스에 강한 사람이었다면, 더 만족스럽게 다닐 수 있었을까.


현재 시각 23시 55분. 카톡에서는 글로벌 스태프의 메시지 알림이 울린다.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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