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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주영 Dec 14. 2020

반신욕을 하면서 뉴스를 읽으면

욕조에 잠겨 잠겨 사라지고 싶다

세상을 양두 쪽으로 나눠보며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싶다.

임대료를 낼 수 없어 서서히 죽는 사람들과 주택을 여럿 갖고 부동산세에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 여긴 비정하고 우스운 곳이다. 무리한 시프트와 방역 절차를 꾸역꾸역 따라가며 잰 발로 일상을 사는 의료진과 편하게 감염자 수만큼 정부에 대한 욕지거리만 늘릴 뿐 하루에 어떤 인위도 늘리지 않는 그 외의 사람들을 보면 이 곳은 별로 구제가 필요하지 않다. 자연재해로 집을 잃는 이들만큼 쓰레기를 한데 모아 버리는 이들이 있고, 입에 호스를 물고 사료를 삼키는 동물만큼 육식의 그릇이 잦다. 모두가 인종이든 문화든 성이든 무엇이든을 근거로 차별을 당하면서 재차 남에게 차별을 넘겨준다.
나라고 아니진 않고 그렇게 양끝을 보면 모든 건 쓸모없고 그냥 나도 너도 모두가 실소 거리다. 아무도 선하지 않고 전부 웃기다.

선생님 전 그래도 도저히 위악은 못하겠어요. 비관주의는 싫어요. 하지만 앞으로 이 위선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표면에 드러난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은 아주 뾰족하고 잔인하며, 허무하고 비정하다. 나이가 서른인데 아직도 완전히 푸르거나 완전히 맑았으면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 세상을 실제로 사는 일을 놓치기 싫다. 실제의 거리에는 정의가 아니라 친절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고 선언문이 아니라 안부인사를 읽는 이들이 숨을 쉬고 있다. 지구 모든 것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은 어디의 모터도 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저마다의 삶의 추에 얹은 것들이 가벼워지지 말라고 애쓰는 노력은 모든 곳에서 매일을 굴린다. 이런 것들을 더 기억하는 힘을 갖고 싶다.

하지만 어렵다. 한번 기합을 억지로 쥐면 평생 버릇이 미움으로 한숨 튀어나온다. 세상엔 정당하게 미워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그걸 멈추면 안 될 것 같다.
나 역시 한참 모자라고 위선적인 일원 같고 이 생애는 앞으로도 신념을 구석으로 밀쳐놓는 실수와 매일 수면의 수문장 같은 부끄러움이 매일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는데.

난 이것 외의 삶을 하려다가 하다가 했다가 몇 번이고 무너졌다. 난 끊임없이 용기가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도저히 부당하지 못함을 못한다. 도저히 의를 참아내지 못함을 못한다. 도저히 꿈을 위해 한걸음을 내딛지 않고는 못 배기지 못함을 못한다.

이 겁쟁이와의 동거가 질린다.
어떤 하루 끝에도 제 일만 마칠 놈을. 사랑을 해도 제 몫을 계산할 놈을. 궐기도 혁명도 혁신도 제안도 앞으로의 달력 한 군데에도 없을 놈을. 나는 먹여야 할까. 재워야 할까. 애틋하게 세상에 매일 헌납하고 돌려받고 감사해야 할까.

내 글은 추상적이다. 차라리 단어 하나에 과자 조각만큼의 가치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먹여 사라질만하기라도 했더라면 난 한 끼니만큼은 쓸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숨을 참고 욕조에 머리끝까지 담았다가 밖으로 나설 것이다. 전쟁 없는 삶에 전쟁 같은 꿈만 꾸다가 직장과 살림과 싸울 것이다. 그리고 작은 친절들, 미워할 수 없는 것들을 내 구멍 난 주머니에 넣을 것이다.

관성으로 산다면, 관성으로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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