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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즈모넛cosmonaut Oct 17. 2020

#1 여행함과 떠남

우주여행자로 사는 법

아이들이 어릴 때였다. 내가 여주로 내려가서 살자는 덕에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나는 출퇴근이 자유로워, 여주로 이사를 가서도 내 일은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9시까지 출근을 해야 했던 아내는 시골생활과 직장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1층 햇빛 잘 드는 곳에 최고의 연구 공간을 만들자”는 나의 제안에 그녀는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그것이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몇 년 지니지 않아 아내의 연구공간은 무용지물이 되어갔다. 시골은 그만큼 매력적이다. 심지어 잔디 주변에 돋아난 토끼풀을 뜯는 것이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것보다 행복감을 주니 말이다. 아이들은 밝게 잘 자라고 있었고 난 큰 사고 없이 교수생활을 이어갔다. 아내의 긴 인생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일견 평화롭고 행복한 시골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여성 칼럼니스트가 꿈이었던 그녀의 인생이 보였다. ‘토끼풀 뽑고 초여름 싱그런 야채를 뜯어먹으며 기뻐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의 엉뚱한 제안 때문에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버리는 건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 내게는 있었다.      




그러다가 2006년에 첫 안식년 얻어 필리핀에서 실컷 놀고 왔다. 안식년은 내 인생에서 정말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 행복감에 감동받아 안식년을 다녀온 직후부터 이름 하여 ‘안식 주 제도’라는 것을 도입했다. 1주일씩 집을 떠나 혼자 여행을 하는 제도인데, 아내가 안식 주를 가면 난 1주일 내내 아이들을 키우며 시골 생활을 건사했다. 동시에 아내는 여행으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여행이 뭐 그리 중요하랴 할지 모른다. 중요하다. 내 경험에 비춰 여행은 정말 중요하다. 난 여행을 자신의 현실 삶으로부터의 떠남이라고 정의한다. 몸도 떠나고 마음도 모두 떠나야 여행이다. 아이 걱정, 일터에서 속상했던 경험 등으로부터 모두 떠나야 여행이라고 난 생각한다. 전화는 받지 않고, 문자 등은 불가피하게 늦은 밤에 한꺼번에 본다. 난 여행을 떠나면 집으로 전화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떠남이 난 참 좋았다.     




이렇게 떠나면 보이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둘은 표류하는 나이다.      


내가 인월에서 출발해서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때였다. 산 중턱 좁은 오솔길을 걷다가 갑자기 앞이 확 트이면서 낮은 구릉 위에 정말 멋들어지게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와 마주하였다. “오~ 소나무야”하는 감탄사가 정말 저절로 튀어나왔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환희, 존재와 조우하는 순간이란 그건 것 아닐까. 현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편안하게 바라보면 그런 환희의 만남을 너무도 많이 경험할 수 있다. 5일장 좌판 할머니의 주름에서 지방 소도시의 골목 풍경에 이르기까지 하나 같이 새롭고 아름답다. 현실의 나를 떠남으로써 그런 아름다움이 나와 함께 존재한다는 걸 노력하지 않아도 깨닫는다.     


집과 일에 치여 돌보지 않았던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몸뚱이와 현실 속에 결박된 나라는 존재자는 바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달성하려고 하는 목표들, 아이를 이렇게 만들어야지 하는 허욕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위해 허겁지겁 일상을 소비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자는 과연 나다운 것인지. 내게 진정 행복이란 무엇인지. 질문들이 끝도 없이 머릿속과 온몸을 휘감는다.     


여행은 그런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툭툭 편안하게 어딘가로 나를 이끌어 준다. 생각해보면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강박이야 말로 근대적 이성이 옭아맨 족쇄에 불과하지 않는가. 가볍게 발길을 옮기면서 ‘아, 나 역시 혹자에게 그 소나무처럼 오~ 할 만큼 아름답게 보일지도 몰라’ 하고 나를 긍정한다. 그리고 마치 여행처럼 더 자유로운 나를 꿈꾸며, 그 안에 나다움, 진정한 행복 등이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우주여행자가 부러운 것은 돌아갈 그곳이 너무너무 멀다는 사실이다. 고작 1주일 안식 주 동안 혼자 여행을 떠나는 나는 항상 우주여행자가 부러웠다. 몇 년이고 떠나 있을 수 있는 데다가, 핸드폰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자주 여행을 떠나야지. 떠나고, 만나고, 돌아보고, 그리하여 자유를 향해 한 발 더 내딛고…. 안식 주가 거듭되고 여행이 잦아지면 내가 우주여행자가 되어 세상과 내 삶을 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여행은 여행처럼 삶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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