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옛날이야기지만, E.T.라는 영화가 있었다. 1982년에 개봉되어 아카데미상을 휩쓸었고, 스티븐 스필버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엘리엇과 외계인 E.T.가 손가락 끝을 마주 대는 순간, 울컥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주여행자라면 E.T.가 엘리엇과 나눈 것 같은, 타인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주고받는 능력이 있지 않을까?
대학생이었던 내가 영화 E.T.를 보고 품었던 궁금증은, 왜 선한 사람들조차 상대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하냐는 것이었다. 내 주변에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으로 가득 찼었다. 엄마, 형, 친구들, 나를 취조했던 수사관, 은사들, 그리고 애인, 심지어는 내가 마음을 다해 사랑을 주었던 구로 3 공단 어느 야학의 여공들조차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다.
외로워서라기보다는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 때문에 난 애늙은이처럼 매일 시름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다녔었다. 대학 생활은 학생운동 덕에 엄청 고되고 바빴고, 항상 어두웠다. 그러던 어느 날 프락치로 오해받던 대학 동기의 한 마디 말이 내 시름을 부끄러움으로 바꿔버렸다. “난 그냥 가난하고 마음이 약할 뿐인데 다들 나를 의심 하네……”.
평소 호방해 보였던 그가 가난하고 마음이 약한 친구였다는 걸 난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에 대한 의심을 풀었고, 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해 많이 후회했다. 아마 그는 뭔가 후과가 두려워서 형사를 만났을 것이고, 그리고 아무 정보도 주지 않으려 애썼을 텐데, 결국 그는 프락치로 의심을 받은 채로 졸업을 해야 했다.
이해받지 못함에 대한 나의 답답증은 그 친구에 비한다면 정말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그 이후 난 E.T.를 정말 부러워했다.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E.T.처럼 독심술이 있다면, 인정 욕구로 괴로워하는 일 따윈 없었을 테니까…. 그 이후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려 애를 많이 썼지만 결국 난 E.T.의 능력에 도달하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지금도 내 주변에는 E.T.의 능력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로 꽉 차있다.
E.T.가 못된 나는 차선책을 찾기 시작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하는 말은 내뱉자마자 이미 모두 실패라는 사실이었다. 인정을 하느냐 마느냐는 나를 바라보는 혹은 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몫인데, 내가 먼저 나서서 “나를 인정하라”라고 그들에게 말하는 건 출발부터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지 않은가. 인정 여부는 그들에 맡기고 그저 몸으로 보여주거나 사실만을 나열해서 말하는 것이 옳다고 난 어느 때부터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가능성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방법이었다. 가능성으로 그들을 보면, 보는 나나 보여지는 그들이나 모두 너무나도 편안했다. 어떨 때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고, 그런 그들을 보며 나 역시 뭔가 찡해오는 감정을 느끼곤 했다. 내가 그들을 인정하거나 인정하기 않거나 한다는 것은 이미 뭔가의 잣대를 가지고 그들을 평가한다는 걸 뜻하지 않을까?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 아니 그 잣대 역시 그럴 자격이 있나? 없다. 둘 다 그럴 자격이 없으며, 오직 있은 것이라고는 그들 주체의 변화와 가능성뿐이다.
E.T.는 못되었지만, 가능성론 덕에 나는 대부분의 학생들을 참 많이 인정하는 교수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변화와 가능성의 주체로 인간을 본다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꽤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독심술도 없고, 텔레파시도 통하지 않는 지구인들에게 가능성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심성이라도 있다면 이렇게 각박하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시건방지게도 자주 하게 된다. 사실 그보다 더 자주 하는 생각은 E.T.를 만나러 어서 우주로 떠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