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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즈모넛cosmonaut Nov 03. 2020

#5 에고(ego), 마음의 공동체를 그리며

우주여행자로 살아가는 법

내가 경험한 에고는 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본능적 충동들을 잘 통제하거나, 관계 속에서 공동선을 이끌어 내는 주체로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프로이트보다는 라캉을 좀 알게 되면 에고에 대한 궁금증이 풀릴 듯도 하다. 물론 난 그 두 분의 석학들에 대해 잘 모른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내게 에고는 진정한 나도 아니고 뭔가 도착적이고 부정적 역할을 하는 놈으로 각인되어 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자랑을 늘어놓는 걸까?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면 뭔가 쾌감을 느끼는 걸까? 경쟁사회의 습속이 타인에 대한 배려의 감정을 저 어두운 골방 안으로 가둬버린 탓일까? 내 생각에는 그리 자랑은 늘어놓은 날은 잠자기 전에 누워서 뭔가 허망함을 느끼고 말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나랑은 다른 감각의 소유자들인가 보다.     


또 어떤 이는 온갖 작은 권력과 논리와 심지어는 위협하는 표정까지 동원해서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매번 그리 의도하거나 계획하지는 않는 듯한데, 그냥 몸에 밴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들 하고 만다. 그래서 성공하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쁠까? 정당한 자기 몫을 넘어 더 많이 얻게 되면 결국 다른 사람이 적게 갖아야 하지 않는가! 조금만 돌아봐도 죄의식 때문에 마음이 편할 수 없을 텐데…. 그 사람들은 종교에서 말하는 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도 물론 많다. 자랑보다는 주눅 드는 마음이 더 크고, 욕심보다는 그저 생존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하는 작은 바람조차 버거운 경우가 우리 주변에 더 많지 않은가. 그런 자신을 힘없이 바라보며, 혹은 그런 자신에게 불같이 분노하며, 한 없이 땅 속으로 꺼져버리거나, 술에 의지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매사에 자기 탓을 하거나 운명 탓을 한다면, 자신에 내재하거나 혹은 운명처럼 찾아올 무엇인가의 가능성들을 부정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만큼 자신을 잘 알고, 운명을 잘 예측한단 말인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는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하나는 혼자 조용히 있을 때 엄습해오는 소외감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소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뭔가 허깨비가 된 느낌이랄까, 아니면 위선적 연극을 하는 느낌이랄까, 그도 아니면 그냥 모두 갈아엎어 새로 태어나고 싶은 자기부정의 심리랄까 하는 것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까….      


다른 하나는 덧없음이다. 다른 이를 깔아뭉개고 더 많이 갖아도 덧없고, 그저 까이고 실패하고 헐벗어도 덧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를 ‘덧 있게’ 해주는 건 도대체 뭔데 그리 꼭꼭 숨어 삶을 이리도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나도 예외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하루는 전자의 부류에, 또 하루는 후자의 부류에 속해 이렇게 저렇게 소외되고 덧없어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다. 에고에게 책임지라고 요구해도 그놈의 에고는 아무 응답도 없이 혼란의 구렁으로 나를 더 깊숙이 밀어 넣을 뿐이다.     


이 허망하고 외로운 에고의 상황에서 그래도 나를 부여잡아 주는 건 변화와 가능성이라는 단어이다. 약탈적인 에고 건 비하적인 에고 건, 내가 아무리 날 관찰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그 둘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악마처럼 휙 하고 내게 들어왔다가 휙 하고 나가버리는, 내가 아닌 내가 착각하고 있는 나일지 모른다. 만일 나의 에고가 항상 변화하고 또 어떤 가능성들을 기다리는 존재라면, 그것은 휙 하고 날 떠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타인을 짓밟은 날은 반성하고 후회하는 에고이면 되는 일이고, 자괴감에 치를 떤 날은 가능성을 믿으려 애쓰는 에고이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기심의 칼춤을 추도록 우리를 가두고 있는 세상이다. 경쟁과 욕심과 허상의 성취를 향해 달리고 또 달리도록 채찍을 휘둘러 대는 세상이다. 그 안에서 세뇌당한 우리의 에고가 이리저리 휘둘리고 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노쳐서는 안 될 것은 내가 만져서 확인할 수 있는 이 몸뚱아리,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에고라는 놈은 그 몸뚱아리와 함께 매일같이 투쟁하고 변화하고 또 가능성들과 만나 새롭게 힘을 내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아주 느리게라도 좋으니 나의 에고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경험들이 조금씩 밝은 기운 쪽으로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안 그러면 결국 우린 소외와 허무로 인해 죽음을 선택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요즘 자꾸 마음의 공동체를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깡통 철학을, 이런 속 답답한 이야기를 좀 털어놓고 함께 나누는 그런 만남이 있었으면 좋겠다. 글을 통하던 말을 통하던 마음을 나누고 공감하며 작은 위안이라도 주고받는 그런 공간이라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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