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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즈모넛cosmonaut Nov 07. 2020

#6 관찰자로 살자

우주여행자로 사는 법

왜 그렇게 안달복달을 하고 사는 건지…. 애간장을 태우며 뭔가 그리 되기를 바랄 때가 참 많다. 그냥 마음만 태우면 그나마 나은데 죽을힘을 다해 노력까지 하니…. 치열한 경쟁사회에 익숙해져 매번 그러려니 하고 지내서 그렇지, 사실 숨이 턱 막힐 때가 너무나 많다. 우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 게임을 시작하는 아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하고 소리소리 지르며 한바탕 씨름을 한다. 컴퓨터 의자를 두고 서로 밀고 당기고를 하다가 너무나 속이 상해 방에 들어가 혼자서 눈물까지 찔끔거린다. 다음 주가 시험인데 아이 걱정이 태산이다.    

  

술자리에서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 자주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미국에 이민 간 친구 자식을 데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답이야”. 요컨대 게임을 하던 뭘 하던 그냥 내버려 두라는 거다. 그게 되냔 말이다, 자식인데…. 난 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곧 닥칠 시험이나 아이의 장래를 왜 당신이 걱정하고 난리냐는 말이다. 난리를 친다고 될 일도 아닐뿐더러, 결국 모든 건 자기 몫이다. 위의 레퍼토리는, 이제부터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먹이고 기분 좋게 잘 지내게 하는 정도로 돌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정도로 거리를 두면 아이 때문에 속상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어진다. 참으로 명언이다.     


90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있으면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진다. 틀림없이 아침을 드셨는데 한 시간이 지나자 왜 아침을 주지 않느냐고 성화를 하신다. 형제들에게 전화를 하고, 모두 모여 병원엘 가고 하며 난리가 났는데, 결국 초기 치매 판정이 나온다. “우리 엄마가 치매가 웬 말이냐”라고 울고불고 또 난리가 난다. 가족회의가 열리고, 결혼 안 한 둘째 딸이 엄마를 밀착 간호하기로…. 난 이런 스토리를 접할 때마다 부회가 치민다. 왜 하필 둘째 딸이어야 하는데?     


정말 부모에게 잘하는 집도 많고, 그걸 나쁘다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둘째 딸의 인생은 뭐란 말인가? 그 둘째 딸이야 말로 자유의 길을 택한 것이었을 텐데 엄마 덕에 그녀는 많은 걸 포기해야 하지 않은가. 한국은 아직 많지 않지만 일본만 하더라도 노인 5~6인이 공동생활을 하는 ‘너스 홈’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노인이 되면 자식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노인 공동체를 꾸려 스스로들 함께 문제를 해결해 갈 법한데, 우리는 그걸 부모를 버리는 죄악인 줄 안다. 가족 중 하나가 밀착 간호를 한다고 결정해놓고 얼마 가지 않아서 폭언과 노인 방치가 일상이 되는 경우도 현실에서는 적지 않다.     


아주 가까운 친구가 벌써 5년째 취준생이다. 나서서 위로도 해주고 같이 공부도 해주고, 그러다 보니 몇 마디 조언도 오간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건넨 몇 마디 말이 친구에게는 큰 상처가 되어 결국 둘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만다. “네가 지금 자꾸 떨어지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라고 보이는데,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한 번 힘내서 해봐”. 지랄, 누가 몰라서 안 하냔 말이다.     


왜 남의 인생에 감 나와라 밤 나와라 하냐는 말이다. 친구란 함께 위로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뭔가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기도 하는 존재이지, 남의 인생에 깊숙이 개입해도 되는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자랄 때부터 부모의 간섭 밑에서 큰 우리는 그 간섭이 사랑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참 많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지울 수 없는 폭력일 수 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아예 안 하는 세상. 참 피곤한 세상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모두 관계 방식의 문제 아닐까? 함께 살아가되 관찰자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각각의 주체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그러면서 정과 사랑을 나누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왜 우리는 여행하듯 살아가지 않는 것일까? 우주여행자가 보면 이해 못할 감정선들이 어디서건 언제이건 매일 발견되니 당혹스럽기조차 할 듯하다. 우주에서는 사람이던 동물이던, 심지어는 식물이던 모두 고귀한 주체이거늘…. 주체로 산다는 것은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자유인으로 산다는 걸 뜻하지 않을까….    

 

주체로서 다른 주체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다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두운 오솔길을 걷다가 확 트인 구릉을 만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아름드리나무를 보고 “와, 멋지다” 하고 탄성을 지르는 그러한 만남.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와의 조우, 환희가 바로 그런 것이다. 거리를 두어야 환희의 발견이 가능해지는 법이며, 관계는 존재와의 조우가 많아져야 환희롭다. 서로 “와, 멋지다” 하고 탄성을 지르는 관찰자적 관계가 요구되는 세상이다. 여행할 때 느끼는 자유로움이 일상에서도 느껴지려면 우리 모두 우주여행자처럼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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