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과 종교, 과학에서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온 주제입니다. 심지어 어른들이 영도다리에서 주워왔다는 일곱 살짜리 아이의 마음에도 잠시 비슷한 질문이 머물렀었습니다.
어느 고요한 밤 깨끗하게 빤 이불 홑청을 꿰매고 있는 어머니의 옆에 누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문득 어머니의 모습이 무척 생소했습니다. 마치 풍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생경했던 기억이 납니다. 갑자기 지금 엄마의 몸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내 엄마가 아닌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올라왔습니다.
만약 외계인이 엄마의 몸을 탈취해서 엄마 행세를 하고 있는 거면 어떡하나. 진짜 나의 엄마는 어딘가에 꽁꽁 가두어 두고 외계인이 엄마 몸속에 들어와 내 엄마인 척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이불 홑청을 꿰매는 어머니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엄마의 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진짜 엄마인지 알아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엄마는 없었다면? 처음부터 외계인이 엄마의 몸에 들어가 있는 거였으면? 엄마는 외계인인가?
엄마는 누구인가. 엄마는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더니 나에게 가닿았습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혹시 나도 이 몸 안에 갇혀 외계인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의 정체는 기억을 잃은 외계인이 아닐까? 엄마도 나도 기억을 잃은 외계인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외계인이 아닐까? 아님 외계인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일곱 살 철학자의 질문은 거기에서 멈추었습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가 기억을 잃은 외계인라면 걱정할 것이 없는 탓이었습니다. 엄마도 나도 외계인이라면 그걸로 된 것입니다. 나는 외계인 엄마의 자식인 외계인일 테니 다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만족스러운 답을 구했던 일곱 살 철학자는 어찌 된 일인지 지금도 매일 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새벽 명상을 할 때마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하는 질문에 답할 때는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보통의 자기소개에서 나오는 내용들로 이루어진 대답이 그 첫 번째입니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직업, 가족 관계, 취미, 성격... 등등 과거와 미래의 내용을 가진 나의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나의 삶의 궤적에서 나타난 경험과 관계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단단해 보이는 이 정체성은 사실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삶이 늘 변하고 변하기를 멈추는 일이 없는 탓입니다.
두 번째 차원은 조금 더 궁극적이고 변하지 않는 차원의 나입니다. 늘 현재 이 순간에 깨어있는 존재감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정의할 수도 없고 나타나고 사라지는 감정의 너머에 있는 근본적이고 깊은 차원의 존재감입니다. 고요하고 깨어있고 자연스러운 상태의 알아차림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늘 있으며 나의 생각과 감정과 직업과 가족 관계와 취미와 모든 것들이 변하는 중에도 단 한 번도 변하지 않고, 단 한 번도 현재의 나를 떠난 적이 없는 열린 의식입니다.
이 알아차리는 존재감은 열린 의식에 드러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합니다. 비가 온다고 하늘이 젖지 않고 바람이 분다고 하늘이 흔들리지 않듯이 모든 생각, 감정, 감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가운데 움직임 없이 늘 존재하며 나타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합니다.
근본적인 차원의 존재감, 현존하는 나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삶에 여유를 가져와 줍니다. 표면적인 삶에서 이루려고 하는 목표에 매몰되어 지금 현재의 삶이 뭔가 부족하거나 옳지 않다는 느낌에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줍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의 몰아침에서 한 발짝 떨어져 그것들을 밀어내지도 붙잡지도 않는 고요한 힘을 삶에 불어 넣어줍니다.
근원적인 존재의 자리에서는 표면적인 존재로서의 나의 모습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자비롭게 안아 줄 수 있게 됩니다. 스스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현존의 알아차림으로 존재할 때 삶이 가벼워집니다. 있는 그대로 흐르게 됩니다.
두 가지 차원의 나는 모두 나의 모습입니다. 근원적인 나와 표면적인 내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인 것이기에 이 둘의 관계는 바다와 파도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하나로서의 내가 바다라면 잠시 지금 이 상황에서 독립된 존재로 분리된 나는 파도입니다. 파도는 바다의 일부이고 바다는 파도의 본래 모습인 것입니다.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려면 일상에서 이 두 차원의 나를 균형 있게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입니다. 표면적인 나에만 너무 몰입이 되면 중심을 잃기 쉽습니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으로써의 나에만 초점을 두고 살아간다면 삶이 어렵고 무겁고 힘들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외형적인 조건으로써의 내 삶에 치중되어 살아갑니다. 내면의 깊은 연결감과 근원적 존재감을 잊고 살아갑니다.
마음이 현재에 머무를 때 고요한 가운데 평화로운 만족감과 은은한 즐거움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고요함을 즐기며 현존의 힘을 느껴봅니다.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도 잠시 활동을 멈추고 조용하고 고요하게 내면의 깊은 자리에 머무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합니다. 점점 그 고요함 속에 드러나는 은은한 만족감에 익숙해집니다. 그렇게 일상에서 내 삶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근원적인 존재감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서서히 삶의 여유와 내면의 중심을 되찾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