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일기
디즈니일과가 길어 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이번 회차로 미루어 쓴다. 출장 목적이거나 부모님과의 여행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낭만을 남편과 와서 새로이 느껴보는 것 같다. 노점에서의 저녁 식사를 배터지게 하고 아이가 깰 때를 대비해서 주전부리를 좀 산 뒤 호텔로 들어갔다.
나는 아기가 낙서한 호텔 벽이 매일같이 마음 속 숙제로 남아 있었기에 오늘 날 잡아서 해결을 해야겠다 싶었다. 미색의 솔리드 벽지이니 흰 아크릴 물감이라도 사서 덮어야겠다는 생각에 홍콩 화방을 검색했더니 마침 도보 10분 정도 거리에 화방이 있다. 남편에게 아이를 잠깐 맡겨놓고 홀로 화방을 향해 홍콩의 밤거리를 걸었다. 밤 8시 관광객과 현지인이 뒤섞인 도로는 네온사인 아래 북적였고, 나도 마치 홍콩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방 미술용품 코너는 시간이 늦어 문을 닫았고 학용품을 팔기에 학창시절에나 보았던 pilot 수성 화이트를 샀다. 학용품들도 대부분 일제이고 가격은 일본의 1.5~2배 정도 비싸다. 가까운 일본에서 더 싸게 살 수 있는 물건들을 비싼 가격에 사려니 아까운 마음이 밀려온다. 화이트와 벽지 느낌의 미색테이프 하나를 사서 밤거리를 걸어오는데 조금 앞에 서점이 보인다. 중국어도 홍콩어도 심지어 한자도 까막눈이지만 그래도 서점의 분위기가 좋아 홀린 듯 서점을 향했다. 최근에는 정말 책이라고는 손에 잡은 적이 거의 없다 싶을 정도지만 그래도 아직 나는 책을 참 좋아한다. 책 내용보다도 책 자체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한자가 가득한 책을 살 수는 없어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마침 예쁜 마그네틱을 팔고 있다. 홍콩을 한자로 쓴 분홍색의 고급진 마그네틱이라 핑크병에 걸린 아기도 좋아하겠다.
바쁘고 조금 우울하고 조금 지쳐보였던 홍콩 사람들을 스쳐지나가며 잠깐 혼자 산책하는 이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아이를 거의 혼자 키우다보니 나만의 시간을 가지기가 쉽지 않은데, 심지어 여행지에서 이런 기회를 가지다니 낭만까지 한스푼 얹었다.
호텔 벽은 나의 그림 실력으로 거의 완벽하게 원상복구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