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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와의 한여름 홍콩 여행기 - 5

노산일기

by sunshine


마지막 여행기를 올리는데 이렇게 지지부진 시간을 끌지 몰랐다. 이전까지 달려왔던 날들과 달리 마지막 날은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일정이 다 꼬여서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기 때문에 진작 글을 마무리 지었어야 하는데 글 하나 쓰는 것도 뭐 이리 대단한 일이라고 물리적 심리적 여유가 없다. 어쨌든 여행의 마지막 기록을 남겨본다.


아침에 눈을 뜨자 비가 억수같이 오고 있었다. 전날의 디즈니랜드에서의 비가 잠깐 오고 말 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식을 근처 맛집을 가 보려고 했는데 유모차를 끌고 우산을 들고 다닐 날씨가 아닌 것 같아 호텔에서 조금 쉬다가 하버시티몰로 향했다. 시간을 끌다가 나온다고는 했지만 10시엔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었다. 식당 하나 찾는 것도 힘이 들어 인적 드문 쇼핑몰을 돌고 돌아 선택권이 없이 홍콩의 맥도날드스러운 홍콩의 패스트푸드를 파는 어떤 식당으로 들어갔다. 홍콩식 누들과 소세지, 베이컨과 레몬홍차, 그리고 커피 한 잔을 시켰고 비주얼은 썩 좋진 않았지만 맛은 또 생각보다 괜찮았고 아침 빈속의 요기를 달래기에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비가 잦아질 줄 알았더니 폭우가 몰아쳐서 도저히 쇼핑몰 밖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일단 쇼핑몰 구경을 하기로 했다. 홍콩의 슈퍼가 또 유명하다고 해서 구경을 해 보았는데 뭐 거의 다 수입이다보니 내가 아는 가격의 1.5배는 기본인 것 같아 보물찾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큰 흥미가 생기지도 않았다. 평소 볼 일이 없는 명품 매장을 좀 둘러보다 재미가 없어서 박물관 같은데나 가자 싶었다. 마침 홍콩과학박물관이 잘 되어 있다고 해서 택시를 잡아 이동을 했다.


박물관 앞에 도착하였고 입구를 찾아갔지만 사람들이 앞에서 웅성웅성 들어가지 않고 있다. 안내판을 보니 Red Rainstorm Warning Signal is in force 라고 쓰여 있다. Red Rainstorm이 뭐여... 일단 들어가서 직원으로 보이는 분을 잡고 물어보니 태풍때매 박물관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언제 여냐니 정부에서 공문이 와야 한다고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홍콩은 태풍이 오면 공공기관은 모조리 문을 닫고 이는 박물관 미술관이 다 포함이라고 한다. 한참을 서 있다가 답답한 마음에 나처럼 방황하고 있는 홍콩 시민을 붙잡고 그래서 비오는 날엔 어딜 가야 하는데?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겠다며 K11 Musea를 가 보는 건 어떠냔다.


이미 첫날에 가 봤지만 그래도 먹거리라도 많을까 싶어 눈물을 머금고 다시 택시 이동을 했다. 스타의 거리에 계획되어 있던 행사들도 다 취소 중이었다. 이런 한치도 앞을 알 수 없는 혼돈의 상황 자체가 여행의 묘미이겠지만 계획을 분단위로 짜는 극 J의 나로서는 이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 K11을 둘러보려니 아이가 여기 왔던데잖아 내가 입는 예쁜 옷은 없어 등등의 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고 도망치듯 레고랜드로 갔다. 가성비가 좋지 않은 곳이라기에 애초에 리스트에서도 빼놓았던 곳인데 비가 이렇게 오니 선택권이 없다. 남편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고 하여 나와 아이만 입장을 하였고, 스스로 나는 레고를 너무 사랑한다를 되뇌이며 최대한 레고로 재밌게 놀려고 애썼다. 내부에는 작은 키카 같은 공간도 있었지만 역시 K-키카에 비하면 슴슴하다. 버틸때까지 버텼지만 오랜 시간은 못 있었고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다가 장난감 가게들에서 시간을 더 때웠다. 장난감 가게의 전시용 제품들을 갖고 노는 시간들이 레고랜드에서 보낸 시간과 맞먹는 것 같다. 아이가 지루하지 않게 해 주려고 역할극을 충실히 했더니 지나가던 홍콩 아기들도 내 매력에 빠지는 것 같았다. 글로벌 피리 부는 아줌마랄까..


더 이상 K11에서 버티기는 지루하기도 하고 날씨 탓에 피로도 쌓이고 해서 일단 호텔로 이동하기로 했다. 우리 식구 모두 계획에도 없던 낮잠을 잠깐 잔 뒤 유일하게 예약을 해 둔 식당으로 갔다. 거위 요리와 돼지 통구이라니 생각만해도 기대가 된다. 오픈시간에 맞춰서 갔는데 곧 현지인으로 자리가 가득 찼다. 음식은 곧장 나왔는데 문제는 한 점 먹자마자 약간 체한 느낌이 있는 것이었다. 피로로 가득한 컨디션에 빈속에 엄청나게 기름진 음식을 갑자기 집어넣어서 그런지 한입 먹고 도저히 먹어지지가 않았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에 오늘의 내 컨디션이 문제인건지 원래 홍콩 전통 음식이 입에 안맞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정찬을 기대했지만 먹는 둥 마는 둥 식당을 도망치듯 뛰쳐나와 호텔로 다시 들어갔다. 루프탑 수영장을 폐쇄했다는데 그래도 비가 좀 잦아들었으니 잠시라도 이용을 할 수 없을까 하는 기대감에 다짜고짜 피트니스센터로 갔다. 짐에는 직원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수영이 가능하다고 하여 기쁜 마음을 안고 방으로 가서 빛의 속도로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수영장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우리밖에 없었던 덕에 통째로 빌린 듯이 한 5분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직원이 다시 오더니 또 다시 태풍주의보가 발령하여 수영장을 폐쇄해야 한다고 한다. 10분 정도만 더 시간을 배려해 주겠다고 하여 짧은 시간동안 신나게 물놀이를 했다. 아이는 수영의 기억이 가장 재밌었다니 아이를 즐겁게 해 주는 일은 생각보다 큰 이벤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수영 후 샤워를 하고 소화가 어느 정도 된 듯 하여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돼지런한 미련이 남아 어제 찾았던 노점을 다시 방문해서 키조개볶음과 새우구이를 먹었다. 아기는 그런 환경이 덥고 시끄러워서 싫다고 했지만 엄마를 위해 조금 참아달라고 했다. 그래도 유순한 편이라 그렇게 얘기하면 참아주는 흉내라도 내는 아기 덕에 이렇게 자주 여행도 다녀본다.


홍콩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덥지 않은 때에 꼭 다시 디즈니를 가자고 아이와 약속도 해 본다.

참, 다음 날 공항에서 먹은 딤섬이 홍콩 여행 중 가장 밋난 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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