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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biing Mar 29. 2020

한나 아렌트의 사회적 거리두기의 미학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고독과 외로움의 경계

해당 글은 Fair Observer 의 Kate Bracht 라는 작가의 글을 번역해놓은 것입니다. 

원본은 링크(link)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어떤 시선에서 보더라도,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몇 년동안, 포퓰리즘과 권위주의는 다시 그 추악한 머리를 들었습니다. 경제는 역사에 남을 정도로 바닥을 쳤고 우리는 환경 파괴의 결과들을 이제야 막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살률은 계속 올라가고 있으며 난민 문제는 정치적 열병처럼 지속되고 있으며 현재 우리는 전세계적 팬데믹 (감염성 유행병) 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마치 문명의 지도에서 그 가장자리에 다다르렀고 그 가장자리 너머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저명한 독일계 미국인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세상에 대한 사랑 아래 전체주의와 홀로코스트와 같은 끔찍한 역사적 참상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많은 해답들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유용합니다. 그녀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서 지금과 같이 코로나 사태로 시작된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서 우리가 앞으로 배울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와 심리학의 오래된 연결성의 관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의 대화


다소 놀랍게도 아렌트는 그녀의 1951년 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외로움에 대한 그녀의 생각으로 작품을 마칩니다. 그녀는 고대부터 폭군 혹은 독재자들은 시민들을 서로에게서 격리시켰다고 합니다. 시민들을 분리하고 불신의 감정을 심게되면 사람들이 무리로서 행동하고 폭군의 권력을 막는 힘을 만드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글을 쓰던 시점과 오늘이 다른 점은 외로움의 확산성입니다.


아렌트에게 외로움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외로움이라는 개념은 시민들을 공공 장소에서 함께 행동하고 힘 혹은 권력을 만드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없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적대감에 노출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춘, 조금 더 실재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오늘날, 외로움이라는 것은 특히나 젊은 성인들 사이에서 유행병 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고립과 외로움에 대한 그녀의 처방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경험이 아닌, 고독이었습니다. 고독이라는 것은 고립과 외로움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으로는 혼자 있는 것을 요구하지만 존재적으로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내가 나라는 존재와 대화를 함으로서 내 자신을 또 다른 하나의 존재로서 동반 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과 고립이라는 두 개념 모두 단절과 황폐함이라는 단어들과 함께 분류될 수 있지만, 고독이라는 개념 안에서 개인은 그 자신과 세상과의 연결을 유지합니다. 내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고독한 한 개인은 그 자신에게 세상에 대해서 대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하는 두 고독한 자아는 다른 인간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하고 교환할 수 없는 자아를 확인하고 하나의 통일된 자아로 거듭나게 됩니다. 


아렌트에게, 고독을 실천하는 것은 생각, 자의식 그리고 창의성을 발현하였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그녀는 "모든 생각은 엄격히 말해서 고독 안에서, 나와 내 자신의 대화 속에서 행해진다." 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물론 고독이란 것은 철학자에게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에서 고독한 상태의 의미는 내 자신들과 함께 있는 것이며 생각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행동들이 고독함에도 불구하고 절대 동반자나 파트너가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사유하는 행동은 궁극적으로 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는 시사점을 탄생시키고 생각을 창조로 변형해 영속성을 얻게되고 공유된 세계의 일부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또한 자의식의 근원입니다. 아렌트는 "정신의 삶" 의 소개글에서 제 3국의 중심 인물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 중에서도 그녀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개념을 다시 되돌아보며 아이히만의 극악이 교만, 시기, 증오 혹은 도덕성의 결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 없음에서 온 것임을 짚습니다.


"나는 행위자의 얕은 생각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악의적인 행동을 더 깊은 수준의 근원이나 동기로 추적할 수 없게 만든다는 사실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행동들은 괴물과도 같았지만, 이 재판에 서 있는, 매우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했던 행위자는 악마같지도 괴물같지도 않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이었다. 그에게 확고한 이데올로기적 신념이나 특별한 악한 동기가 있다는 징후는 전혀 없었으며, 과거의 행동 뿐만 아니라 재판 도중의 행동과 재판 전 검찰 검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은 완전히 그 반대였다. 그 사람의 우둔함 (stupidity) 에서 온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음 (thoughtlessness) 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아렌트는 재판을 통해 악의 과정이나 일상적임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 혹은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 전혀 모르는 아이히만의 무력감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길, "클리쉐, 주가 표현, 기존의 표준화된 표현 및 행동 규범을 준수하는 것들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기능을 가지고 있고, 이는 모든 행동과 사실이 그들의 존재의 미덕이 만든다는 우리의 통상적인 생각과 반대된다 라고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시점에도 아렌트는 생각의 부재가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나 일반적인 일이며 우리의 성향은 남겨두고 오롯이 '생각'을 하는 시간이 일상에서 얼마나 적은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아렌트는 생각의 내용에 상관없이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악을 행하는 것에서 반대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활동과 연관시킵니다다: "'자의식' 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나와 나에 의해서 아는 것' 이며 사고하는 매 과정에 발현되는 지식을 의미한다" 




독재에서 전체주의까지


마지막으로, 고독은 창의성을 위해 필요합니다. 창의성이라는 것은 행동과 실천 그리고 세상의 공통 관심사로부터의 분리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고립된 창의적인 인간은 공유되는 세속적인 것들과 연결되어있으며 공유된 세계에 실질적인 무언가를 창출합니다. "전체주의의 기원" 에서 아렌트는 사적인 창의성을 독재에 맞서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독재 아래 공적인 공간이 파괴되었을 때, 개인은 자신의 새각이나 창의력을 개인적인 공간으로 가지고 갈 수 있다. 그 이유에서 역사적으로 독재자들의 통치 하에서 예술은 번성하였다." 


고독의 세가지 효과— 자의식, 사고, 창의성 — 은 새상을 새롭게 바꾸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아렌트에게 "세계"는 기술적인 단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고 사는 공간이며 우리가 죽고 난 후 남겨두는 공간입니다. 그것은 법, 문학, 예술, 음악, 철학, 제도 그리고 모든 하나된 혹은 분리된 모든 물리적인 것들이며 우리의 공유된 삶 안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가 지향하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인간의 삶보다 더 단단합니다. 동시에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무너지기도 하고 지속적인 갱신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각 세대에게 주어지는 미션의 일부가 됩니다. 


이것은 특히나 젊은 성인들과 미국에서 다른 사람과 주요 기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위안이 되는 뉴스일 수도 있습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현상이 어떤 면에서는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제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너집니다. 우리가 세상을 새롭게 갱신하는데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나 고독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우리는 혼자 있는 법을 잊었습니다.


과거의 괴물들을 기억하나요? 권위주의 정치, 무서운 이데올로기 그리고 무의식적인 파괴적인 행동은 오늘날 복수 (vengenance) 라는 개념으로 재포장되었습니다. 아렌트는 고립과 외로움의 전염병과 더 커지는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움직임 사이에 연결성이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에서 외로움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체주의의 전 단계 (pre-totalitarian)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본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느낌이며 한 사람을 취약하게 만드는 감정입니다. 그녀는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비전체주의적인 세상에서 인간을 전체주의 지배로부터 준비시키는 것은 보통 노년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겪어야했던 외로움이 오늘날 대중적인 일상적인 경험이 될 때이다. 전체주의가 대중을 이끌고 조직하는 그 무자비한 과정은 지금 현실로부터의 자살과 같은 탈출이다. 당신을 옥죄어 오는 냉담한 추론과 강력한 변증법은 아무도 신뢰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이 세상에 대한 마지막 지지와도 같다." 


"아무도 신뢰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을 경우", 그 해답은 자신이 자신과 대화하는 고독이며 이는 자의식과 생각 그리고 창의성을 발현시킵니다. 이것들은, 그에 따른 대가로서 세상을 다시 재건합니다. 


한가지 주의사항: 아렌트에 따르면 고독은 독재적 지배 하에는 가능하지만 전체주의적 지배 아래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독재는 공공장소를 컨트롤 하지만 생각과 자의식과 창의성의 가능성이 있는 개인적인 공간은 침해하지 않았습니다. 전체주의는 개인적인 공간을 침해하며 테러, 외로움, 이데올로기 등을 통해 개인의 개인에 대한 존재를 방해합니다. 고독을 행하는데 있어서 힘든 부분은 내 자신이 정신적으로 식민화되는 것이 아니라 대신 내 자신과 세상과 연결하는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히어로를 향한 부름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19와 싸우는 가장 최전선에 있습니다. 그들의 직업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기 위해 그들의 육체적인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라 고독이라는 행동을 통해 본인과의 대화를 실천해야합니다. 


우리 세계는 변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그 변화는 위에서 부터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변화는 아래서부터, 개인들의 일상적인 선택으로부터 생길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고독이 불러올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것을 세계로 불러올 수 있는 시작의 가능성입니다. 아렌트에게 있어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상에 무언가를 가져올 수 있는 이 능력은 우리 각자가 태어날 때 받는 선물입니다. 그녀에게 이것은 일종의 기적이며 믿음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외로움의 순간들을 고독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있는 사람 모두 고독을 실천할 수 있으며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 잃어버린 미학을 다시 한번 얻을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고독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생각에 잠겨보고 나의 자의식을 살펴보고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하는 고독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우리는 세상을 다시 변화시키기 위한 믿을만하고 신뢰가 가는 우리와 동일한 존재들과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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