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백원담/푸른숲/2020년)
이 책의 저자 위화는 1960년 중국 저장성에서 태어났다.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치과 의사에서 전직하여 1983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인생』 (1993)과 『허삼관 매혈기』 (1995)가 큰 인기를 끌며,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중국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1994년 『인생』을 원작으로 만든 동명의 영화(장이머우 감독)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위화의 이름도 전세계에 알려졌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통과하며 민중의 고달픈 삶을 그려낸 그의 작품들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그가 그려내는 척박한 현실, 가족애, 해학, 순응의 정서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위화의 소설은 단숨에 읽힌다. 쉽고 재미있고 간결하다. 기교나 수식이 거의 없는 담백한 글 속에서 그가 지향하는 작품세계가 읽힌다. 그의 마음이 향한 곳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이다. 고통스럽지만,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을 향한 그의 붓끝은 에두르지 않는다. 그의 글은 난해해야만 대작이 아님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푸구이 노인의 삶은 기구한 인생의 결정판, 새옹지마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저자는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대신, 푸구이의 인생 전반을 담담하게 훑듯이 들려준다. 소설은 민요를 수집하는 ‘나’에게 푸구이 노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을 취한다.
푸구이는 젊은 시절, 지주 집안의 망나니 아들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기생집을 드나들고 도박으로 전재산을 탕진한다. 도박빚으로 집까지 넘어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쓰러진다. 어머니의 약을 구하려다 군대에 끌려가고, 2년만에 돌아왔을 땐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어린 딸은 농아가 되어있다.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가 살아올 수 있었던 건 가족들에게 가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비록 가난한 소작농이지만, 가족들과 함께여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후 푸구이의 삶은 작은 행복과 큰 비극이 교차 반복된다. 아들 유칭, 딸 펑샤, 아내 자전, 사위 얼시, 손자 쿠건까지,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두 죽고 홀로 남은 푸구이는 ‘푸구이’라 이름 붙인 늙은 소와 함께 살아간다.
푸구이의 고달픈 인생사는 그만의 특수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물살에 휩쓸리며 살아남은 그 시대 보편의 인생들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꼿꼿이 서서 저항하는 삶이 아니라, 꺾이고 스러져도 엎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다시 살아가는 삶들이다. 푸구이는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까지 중국 역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았다. 역사와 사회의 거대한 폭압 하에서 개인의 삶은 너무 쉽게 무너지고 부서진다. 무너지고 부서져도 스스로 삶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가족을 모두 떠난 보낸 그는, 이제 그 자신을 삶의 끈으로 삼은 듯하다. 도살장에서 죽기를 기다리던 늙은 소의 눈물은 그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웠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낸 늙은 소 푸구이와 운명의 심술에 굴하지 않는 노인 푸구이는 그렇게 함께 살아간다. 마치 자신과 화해하듯, 두 푸구이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화자가 푸구이 노인을 처음 만난 날, 밭을 갈던 소에게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얼시! 유칭! 게으름 피워선 안 돼. 자전! 펑샤! 잘하는구나. 쿠건! 너도 잘한다.” (p.20)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화자가 이 소의 이름이 도대체 몇 개나 되냐고 묻자, 노인은 “소가 자기만 밭을 가는 줄 알까 봐 이름을 여러 개 불러서 속이는 거지. 다른 소도 밭을 갈고 있는 줄 알면 기분이 좋을 테니 밭도 신나게 갈지 않겠소?” (p.21) 라고 답한다.
장난기 가득한 노인의 대답에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소의 이름은 푸구이. 노인의 이름과 같다. 늙은 소에게서 동지애와 연민을 느낀 푸구이 노인이 소와 자신을 동일시했음을 알 수 있다. 얼시, 유칭, 자전, 펑샤, 쿠건. 노인이 소를 속이기 위해 부른 이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이름이다. 푸구이라는 이름의 늙은 소 곁에서 얼시, 유칭, 자전, 펑샤, 쿠건이라는 이름의 소들이 함께 밭을 간다는 상상은 단지 소를 속이기 위한 잔꾀가 아니었다. 그렇게 부름으로써 푸구이는 늘 가족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는 셈이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p.278)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은 뭘까? 사랑하는 아내, 자식, 손자를 모두 잃는 일이 아닐까? 그럼에도 삶을 긍정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노인의 태도에 숙연해진다. 오늘 내게 오는 고통, 고난, 그 어떤 불운도 모두 나에게 오는 것이라면 긍정하고 담담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산다는 건 뭘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인생은 왜 이렇지?’ 누구라도 살다 보면,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있다. 정답 없는 질문들에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종교, 철학, 문학에 탐닉하기도 하고, 오직 ‘삶’ 자체에 답이 숨겨져 있다고 믿기도 한다. 그럴 듯한 말 몇 마디가 내 삶의 의미를 찾아주진 않는다. 그렇기에 청소년기에 시작된 질문은 노년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답은 자신의 삶 속에 있기 마련이나, 한 개인의 인생을 들여다봄으로써 안개가 걷히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고통의 세월을 꿋꿋하게 건너온 노인의 너그러운 표정에서 생이 감춰둔 비밀을 엿볼 수도 있다.
사는 게 녹록지 않을 때,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푸구이 노인의 이야기를 읽고나면 내 삶의 고통도 긍정하는 힘이 생길 것이다. ‘나만 힘들게 사는 것 같다’며 좌절하는 사람에게, 푸구이 노인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나도 살잖소. 못 살게 뭐가 있겠소?”
푸구이 노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서문을 읽어보니 이번엔 저자가 또다시 등을 두드려준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p.13) 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생들을 포용하는 저자의 눈길이 느껴진다.
가슴이 미어지는 비극을 읽었는데 이상하게도 생의 의지가 퐁퐁 솟아나는 듯하다. 아마도 푸구이 노인의 음성과 저자의 따뜻한 눈길 때문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