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이난아/민음사)
『내 이름은 빨강』은 오르한 파묵이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극적 긴장감과 흥미유발을 위해 몇 가지 특징적인 형식을 취한다. 우선 이 소설은 추리소설 기법으로 진행된다. 첫 장면부터 이미 죽은 엘레강스라는 세밀화가가 죽음의 순간과 죽어있는 제 몸뚱이에 대한 묘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엘레강스는 독자들에게 자신을 살해한 살인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극중 인물들 뿐 아니라, 독자도 살인자의 정체를 적극적으로 추리하는 주체가 된다. 조금씩 주어지는 단서들을 토대로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긴장감과 몰입감이 유지된다.
이 소설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다중 화자 방식이다. 등장인물들이 각 챕터별로 번갈아 화자로 등장한다. 1인칭 시점의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작중 화자는 주요 인물들 뿐 아니라, 개, 나무, 죽음, 금화 등 동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는다. 물론 이는, 커피숍에서 이야기꾼이 개 그림과 나무 그림 등을 걸어놓고 청중들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임이 나중에 드러난다. 그러나 각 챕터를 읽을 때 독자들은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며, 그런 비인격체 화자의 서사는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연극적 요소다. 각 챕터에서 화자들은 소설 밖의 독자에게 불쑥 말을 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당신이 나를 죽인 그 후레자식을 찾아낸다면 당신에게 저세상에서 본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주겠다!(1권 p.18-죽은 엘레강스가 하는 말)
내가 살인 현장의 세부적인 상황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기만 하면 당신들은 곧 내가 누군지 알게 되고, 나는 더 이상 당신들 사이를 유령처럼 떠도는 이름 없는 살인자가 아니라 얼굴과 이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당신들 중 누군가의 손에 머리를 맞아 죽고 마는 평범한 범죄자 신세가 되겠지. 그래서 당신들이 허락한다면, 나는 그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겠다. 나 혼자만 아는 뭔가를 감춰 두고 싶다. 당신들처럼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발자국만 보고 도둑을 잡아내듯 내 말투와 색깔로 내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1권 p.42-살인자가 하는 말)
여러분은 제가 카라에게 준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겠죠. 나도 물론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궁금증을 풀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도 이 책의 앞부분으로 책장을 넘기듯이, 카라에게 편지를 전달하기 전에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들어보세요.(1권 p.77-에스테르가 하는 말)
이렇듯 소설 안의 인물들이 소설 밖의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은,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함께 찾아보게 한다. 즉 독자들은 사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적극적인 수사관의 역할을 맡은 느낌이 든다. 다소 연극적이기도 한 이런 서술 방식은 몰입감과 함께 친근감을 주는 효과를 낸다.
소설의 배경은 16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이스탄불이다. 베네치아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는 에니시테는 그곳에서 본 초상화에 매료되어 술탄에게 베네치아 화풍을 아뢴다. 술탄은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고픈 욕망으로 에니시테에게 비밀리에 책 제작을 지시한다. 책이 완성되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힘을 보여줄 수 있도록 베네치아 공국에 친교의 선물로 보내주려는 계획이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전통적인 화풍은 신의 시점에서 투시법을 통한 평면적 묘사이며, 원근법과 상관없이 신이나 술탄 등 주인공을 중앙에 크게 그리고 주변인과 사물은 작게 그렸다. 그림은 이야기를 위해 존재할 뿐, 그림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세밀화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면 안 되고 전통적인 화법을 수십 년 동안 모사해 기억에 의존한 그림을 그린다. 반면 베네치아 화풍은 인간의 시점에서 원근법과 그림자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눈으로 보이는 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며, 그림 자체가 목적이다. 이 곳에서는 그림 속 피사체의 개성도 중시되고, 화가의 개성도 중시된다. 따라서 베네치아 화풍은 스타일과 서명이 존재한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서 베네치아 화풍을 따르는 것은 신성모독이고 이슬람을 배반하는 것이라 여겼다. 술탄이 지시한 베네치아화풍의 책 제작이 비밀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술탄의 지시를 받은 에니시테는 궁전 화원 소속 엘레강스, 올리브, 나비, 황새 네 명의 세밀화가들에게 책 제작을 위한 그림을 의뢰한다. 전통 화풍과 서양의 화풍, 신성모독과 스타일 추구에의 욕망 등 당시 세밀화가들의 갈등 속에 엘레강스와 에니시테가 살해된다. 엘레강스의 죽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용의자로 지목된 세밀화가 세 명 중 누가 범인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와중에 에니시테의 딸인 세큐레와 세큐레를 사랑하는 카라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이야기의 또 다른 줄기이다.
12년 동안 세큐레를 사랑했던 카라가 모든 난관을 뚫고 세큐레와 결혼하는 과정이 한바탕 소동극처럼 펼쳐진다. 전쟁터에서 실종된 세큐레의 전남편이 돌아올지에 대한 긴장감과 세큐레를 사랑하는 시동생 하산과 세큐레의 큰아들 셰브켓 등 카라와 세큐레의 결혼을 방해하는 장애 요소들 때문에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하다. 그 와중에 두 남녀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중요한 순간에 사건의 해결사 역할을 하는 방물장수 에스테르 역시 극에 생기를 불어넣는 존재감 넘치는 조연이다. 세큐레와 카라의 결혼 과정을 보면 당시의 이슬람 관습과 결혼 풍습을 알 수 있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과의 혼인이 일반적이었던 당시에,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한 세큐레는 주체적인 여성이다. 실종된 전남편과의 이혼과 카라와의 재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녀의 지략은 놀라웠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얻기 위해 카라를 잘 이용하는 그녀는 영악스럽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이 소설의 무게추는 좌충우돌 결혼 소동극이 아니라, 당시 세밀화가들의 삶과 오랜 세월 풍미했던 화풍이 쇠퇴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데에 있다. 대가가 그린 그림을 수십년간 모사하며 기억에 의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흥미로웠고, 성적 착취를 당하고 매 맞는 도제 생활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그들의 삶이 안타깝고 슬펐다. 그들은 개성도 자유의지도 가질 수 없었으므로, 예술가가 아니라 부속품에 가까운 삶이었다. 그림 자체를 목적으로 그려도 안 되고, 보이는 대로 그려도 안 되고, 자기만의 개성이 드러나도 안 되었다. 권력자의 지시에 의해, 오직 권력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림의 일부분만을 담당해서 그려야 했다.
예술과 예술가가 종교와 권력자를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했던 때에, 인간 중심의 베네치아 화풍은 그들 세계관을 전복시키는 충격적인 그림이었다. 변화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혼란과 공포는 흔히 간과하기 쉽다. 파묵은 생소했던 세밀화가라는 직업과 그들이 느꼈을 변화의 공포와 갈등을 추리소설 형식의 이야기 속에 밀도 있게 그려보인다.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기록에서 창작으로, 몰개성에서 개성 중심으로의 변화는 역사와 문화의 발전에서 필연적이다. 그러나 결국 전통적인 화풍의 세밀화가 쇠퇴하고 서양의 화풍을 모사하게 되면서 그들의 독창적인 문화도 사라지고 만다.
페르시아에서 영감을 받아 육성되고 이스탄불에서 100년간 꽃을 피운, 이 그림 장식과 그림에 대한 열정의 빨간 장미는 이렇게 시들어갔어요.(…) 왜냐하면 그림 자체가 버림받았기 때문이에요. 화가들은 동양인들처럼 그리지도, 서양인들처럼 그리지도 못했습니다. (…) 그들은 자신의 병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노인처럼 서서히 겸허한 슬픔과 체념으로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2권 p.373)
전통과 문화가 어떻게 쇠퇴하고 사라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전통은 사라지고 정체성을 잃은 문화는 침체를 겪는다. 우리의 전통 문화가 쇠퇴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보는 듯해서 더욱 씁쓸했다. 그렇다고 변화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전통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모방은 어쩌면 당연하다. 모방을 통해 정체성이 모호한 과도기도 필요한 과정이다. 문화의 발전도 정반합의 과정을 거친다.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모방하는 데 급급한 시기를 거쳐 전통과 외래문화의 조화 속에 또 다른 독창적인 문화가 창조될 수 있다.
한 편으론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전통의 맥이 끊어지지 않아야 제 3의 창조도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세계관이나 문화가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서양의 세계관과 인본주의 사상이 뿌리깊은 나의 사고는 소설 속 오스만 화풍은 극복해야 할 구시대적 유물로 느껴졌다. 대가의 화풍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눈을 찔러 눈멂을 택했던 화가들의 이야기에서는 야만적이라고 느꼈다. 전체 그림을 위해 일부분을 완벽히 모사해야 했던 부속품 같은 세밀화가들의 삶은 그들이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들의 작업방식과 화풍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는 독창적 문화이다. 찬란히 꽃피웠던 100년의 문화가 쇠퇴해 가는 과정이 쓸쓸하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쓸쓸하다. 소멸하는 운명 앞에 사라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소설에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찬란한 문화가 사라지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 담겨 있다. 변화의 물살에 쓸려가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소설 속에서 배반과 살인으로 점철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예술과 문화는 그 모양을 바꾸어갈지언정 본연의 생명력이 다하진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인 ‘내 이름은 빨강’의 ‘빨강’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1권 p.359)
여기서 빨강은 예술과 예술혼, 더 좁게는 회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회화 혹은 예술을 의미하는 빨강은 단호하고 집념이 있다.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고 회화 또는 예술은 사방 어디에나 있다고 말한다. 삶은 그에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그에게로 돌아온다고 외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 예술혼 혹은 문화, 혹은 회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겉모습을 바꿀지언정 어디에서건 불꽃처럼 타오른다. 그러니 한 문화가 또는 화풍이 쇠퇴하고 사라졌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는지도 모른다. 겉모양을 바꿀 뿐 사방 어디에서건 당당히 존재하고 있다가 눈길을 받는 어느 순간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이다.
*읽은 때 : 2020.7.16~2020.7.27
*기록한 때 : 2020.7.30.
*별점 : 4.0/5.0
*한 줄 평 : 대중성과 문학성을 모두 갖춘 수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