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여인』(오르한 파묵/이난아/민음사)을 읽고.
*이 글은 소설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의 열 번째 장편소설인 『빨강머리 여인』은 터키 내에서만 40만부가 팔린 화제의 책이다. 오르한 파묵은 2006년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동서양 문화의 만남과 터키의 정체성 탐색 등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도 동서양의 신화와 전설을 현대의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와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 속 뤼스템과 쉬흐랍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젬의 인생과 연결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오이디푸스 신화와 뤼스템, 쉬흐랍 이야기는 이 소설이 어떻게 전개될지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오이디푸스는 저주 받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친부로터 버림받지만, 결국 돌고 돌아 신이 정한 운명대로 친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다. <왕서>의 뤼스템은 하룻밤 정사로 태어난 자신의 아들 쉬흐랍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들을 죽인다. 쉬흐랍과 뤼스템의 이야기는 젬에게서 재현된다. 다만 이때 죽는 이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다. 젬의 스토리는 뤼스템과 쉬흐랍 모티프에서 출발해서 오이디푸스 모티프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의 시작은, 17세 소년이던 젬이 학비를 벌기 위해 우물 파는 명장인 마흐무트 우스타를 따라 왼괴렌에 머물던 때로부터 시작한다. 마흐무트 우스타와 젬은 명장과 조수, 스승과 제자이자,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가 된다. 마흐무트 우스타는 젬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의견을 물어주고 자상하게 대해준다. 젬은 그런 마흐무트 우스타를 좋아하는 한편, 그가 두려워지기도 하고 그에게 반항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그러던 어느 날 젬은 유랑극단 배우인 빨강머리 여인에게 반하고 그녀와 동침한다. 빨강머리 여인은 젬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너를 알아’라는 눈빛으로 달콤한 미소를 보낸다. 엄마뻘 되는 나이의 그녀가 왜 열일곱 소년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냈을까. 그녀는 젬의 아버지와 사랑했던 여인이었음이 훗날 밝혀진다. 그녀는 처음부터 젬이 옛 연인의 아들임을 한 눈에 알아본 듯하다.
서양에서 빨강머리는 분노, 호전적, 도전 등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이 책에서도 귈지한이 빨강머리로 염색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비극과 운명이 그녀의 선택이었다고 이해해야 할까? 젬의 아버지도 빨강머리 여인과의 사랑으로 가정을 등졌고, 젬도 그 여인 때문에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운명을 맞는다.
이제 막 성에 눈 뜬 소년이 그녀의 달콤한 미소에 넋을 빼앗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젬은 신이 놓은 운명의 덫, 함정에 걸려든 게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이 소설에서 ‘빨강머리여인’은 운명의 덫, 치명적 유혹의 의미로 보인다. 삶에서 함정이 지뢰밭처럼 곳곳에 놓여있을 때, 그 함정을 무사히 넘어가기 위해서는 행운도 따라야 하고 인격적 성숙도 따라야 한다. 집 떠난 미성숙한 소년이 유혹과 위기를 만났고, 그것들을 무사히 넘어서지 못했다. 여기서 ‘유혹’은 빨강머리여인과의 성적 경험이고, ‘위기’는 젬의 실수로 우물 속에 있는 마흐무트 우스타가 위험에 처한 일이다. 그리하여 운명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빨강머리 여인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성적 경험은 어른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어른이 된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립성을 찾아 떠나야 한다. 그리하여 젬이 우물바닥에 마흐무트 우사타를 내버려둔 채 도망가버리는 사건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 자아를 찾아 떠나는 은유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죄책감이 따라온다. 이때 빨강머리 여인은 소년을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젬은 자신이 마흐무트 우스타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죄책감에 휩싸일수록 아버지 살해 모티프인 오이티푸스를 떠올렸고, 운명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 비극의 원인이라고 결론내린다. 젬은 비극적 운명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젬의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소재인 동시에, 진실로부터 도망쳐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달콤한 소재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인을 합리화하며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살아가지만, 운명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가 평생 심취했던 이야기와 자신의 인생이 똑같은 결말을 맺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늘 머릿속에 되뇌고 있는 것은 스스로 자기장을 만든다.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뤼스템, 쉬흐랍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근원을 알 수 있는 열쇠가 될까? 신화와 전설 속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분신이면서 언제든 아버지에게 도전하고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사랑하는 존재인 동시에 견제해야 하는 존재다.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닮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어한다.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아버지의 영향권 아래 머물기만 하면 독립된 자아를 갖지 못한다.
반면, 아버지의 부재는 수많은 비극성을 야기한다. 오이디푸스와 쉬흐템의 비극은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운명을 피하기 위해 오이디푸스를 내다버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젬은 곁에 있어주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부친 살해나 자식 살해 이야기에 강렬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두 이야기에 매료되는 젬에게서 가슴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상처가 보인다. 아버지의 존재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의 독립성을 옭아매려는 권위에는 반기를 드는 젬의 심리가 부친 살해 모티프와 연결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존경, 사랑, 친밀, 견제, 위협, 경쟁, 권위, 복종 등 복잡미묘한 관계라는 걸 이 소설에서는 깊이 있게 보여준다.
파묵은 모든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 존경, 견제, 경쟁, 복종, 저항, 의존, 독립 등 상반되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페르시아의 옛이야기인 뤼스템과 쉬흐랍 이야기를 엮어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처음부터 한 가지 주제와 결말을 향해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오직 한 길을 가는 소설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신화를 통해 문학적 재해석을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독창성이 엿보인다.
모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신과 인간의 관계로 치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복종, 자유, 보호, 독립 등 다양한 가치 대립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젬을 젬의 아들이 죽이는 결말은 새로운 세대로의 전환으로도 읽을 수 있다. 젬이 아들의 총에 맞아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설정은 내면의 죄의식, 심연의 자아를 찾아 회귀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다양한 해석과 은유가 가능한 작품이기에, 재독과 토론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가는 맛이 난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은 조금씩 파내려가는 우물 같은 작품이다.
*읽은 때 : 2020.7.1~2020.7.13.
*기록한 때 : 2020.7.15.
*별점 : 3.8/5.0
*한 줄 평 : 간결한 문체, 명확하고 속도감 있는 서사로, 파묵의 소설 중 가장 가독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