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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주 Dec 13. 2020

요리에 버무린 사랑과 운명 -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권미선/민음사)

  

첫맛은 달콤하지만 뒤이어 쓴맛이 입안 가득 번지는 초콜릿. 쌉싸름함을 품고 있어 더 매료되는 달콤한 초콜릿은 흔히 사랑에 비유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멕시코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장편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처음 보았을 때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를 예상했다. 이 소설은 달콤 쌉싸름한 사랑 이야기도 담고 있으나, 전통과 악습의 문제, 억압과 자유의 문제, 사랑과 욕망의 경계 등 다양한 생각거리들을 품고 있다.    

 

이 소설의 원제목은 ‘Como agua para chocolate’로, 초콜릿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심리 상태나 상황을 의미한다. 사랑에 빠진 주인공의 감정과, 그 사랑을 가까이 두고도 이루지 못하는 심정, 불합리와 악습에 저항하는 스토리에 꼭 들어맞는 제목이다. 저자 라우라 에스키벨의 남편이었던 알폰소 아라우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느낌의 제목으로 바꾸었고,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된 판본에도 이 제목을 따랐다.      


이 책은 요리책 형식을 취한다. 각 장은 1월 크리스마스 파이, 2월 차벨라 웨딩 케이크, 3월 장미 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 등 열두 달과 요리를 연결시킨 구성이 독특하다. 각 장은 요리 재료와 요리 방법 소개로 시작되고, 그 요리들은 스토리 전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요리를 주요 모티프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요리 문학’의 원형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요리와 음식은 매우 중요한 소재이다. 주인공 티타의 요리 안에는 그녀의 감정이 주문처럼 녹아들어간다. 요리 속에 녹아든 티타의 감정이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그로 인해 사건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뻗어가기도 한다. 티타의 슬픔과 눈물이 들어간 웨딩 케이크는 하객들에게 구토를 일으키고, 페드로가 선물한 장미꽃잎을 넣은 요리는 사람들에게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을 끓어오르게 한다. 이 소설에서 요리는 티타의 감정을 드러내는 매개물이자, 자아표현의 수단이다. 티타는 요리를 하며 자신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거나 분출한다. 요리할 때 느낀 티타의 슬픔, 분노, 욕망, 사랑이 음식을 통해 마법처럼 되살아난다. 저자 라우라 에스키벨은 이런 과정을 매우 관능적이고 초현실적으로 그려보인다.      


이 소설에서 요리는 가정내 불평등한 지위와 노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티타는 마마 엘레나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막내딸이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가문의 전통 때문에 티타는 결혼을 금지당하고 요리는 물론, 갖은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하녀가 있긴 하나, 요리는 티타의 몫이다. 티타는 태어나자마자 요리사인 나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 탁월한 요리 감각과 재능을 갖는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요리를 하는 티타의 노동 강도는 다른 가족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과중해 보인다.    

  

요리는 티타에게 부당하게 부과되는 고된 노동이지만, 티타의 자부심이며, 감정의 분출구이자, 자기 표현의 매개체이다. “시인이 단어로 유희를 즐기듯 티타는 음식을 마음대로 요리하며 유희를 즐겼다.” (p.77) 라는 표현은 티타에게 요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잘 드러낸다. 티타에게 요리는 시이고, 춤이고, 음악이고, 예술이다. 그리하여, 티타의 요리에는 그녀의 희로애락이 숨김없이 담겨있다.    

 

티타에게 요리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듯, 티타가 머무는 부엌이라는 공간에도 이중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부엌에서 태어나, 부엌에서 자라고, 부엌에서 살아가는 티타에게 부엌은 소외의 공간인 동시에, 안식처이다. 부엌은 티타에게 가장 따뜻한 공간이면서 가장 외롭고 힘겨운 노동의 공간이다. 이는 가부장제 아래의 여성들에게 부엌이 갖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소설에서 부엌만큼이나 중요한 공간은 ‘어두운 방’이다. 마마 엘레나만의 은밀한 공간이었던 ‘어두운 방’은 그녀 사후엔 페드로와 티타의 밀회의 장소가 된다. ‘어두운 방’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공간이라 볼 수 있다. 누구나 비밀스러운 욕망을 감춰둔 ‘어두운 방’이 내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마마 엘레나의 욕망을 위해 희생된 두 남녀가 그녀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의미심장하다. 욕망은 억압할수록 부풀어오르고 쉽게 억눌러지지 않는다는 걸 마마 엘레나는 왜 몰랐을까.     


티타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티타를 조금씩 조금씩 죽여왔고, 아직까지도 완전히 죽이지는 않고 있었다. 페드로와 로사우라의 결혼으로 티타는 메추리처럼 고개가 꺾이고 영혼도 꺾였다. (p.56)  


강압적이고 독선적인 부모가 아이의 영혼을 어떻게 죽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악습을 강요하는 마마 엘레나로 인해, 가족들 모두가 고통을 겪는다. 사랑 없는 결혼을 한 로사우라도, 티타 곁에 머물기 위해 그녀의 언니와 결혼한 페드로도, 사랑하는 사람을 형부로 두어야 하는 티타도, 모두가 불행했다. 자식들을 감시하고 늘 불안해했던 마마 엘레나도 분명 불행했으리라.     


페드로와 티타의 사랑이 안타깝긴 하지만, 책임이 결여된 사랑이었다. 페드로는 존 브라운과의 결혼을 택한 티타를 존중해 주지 않았다. 반면 존 브라운은 사랑하는 여인을 끝까지 존중하고 지지해주었다. 티타는 존 브라운의 배려와 보살핌으로 한층 성숙해진다. 누군가의 깊은 배려와 정신적 지지를 받은 후에는 그 이전의 나약한 자아를 벗고 한층 단단해진다. 존은 티타에게 성냥 이론을 들려주어, 그녀의 내면을 일깨운다.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을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 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듯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p.124~p.125)     


티타는 ‘차가운 입김을 가진’ 마마 엘레나로 인해 자신 내부의 강렬한 불길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다. 티타는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불꽃을 페드로에게서 찾으려 했다. 두 사람의 사랑과 욕망은 너무 강렬해서 두 사람을 송두리째 태워버리는 불꽃이었다. 영혼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건 강렬한 불꽃보다는 오히려 존 브라운처럼 은은한 불꽃일지도 모른다. 페드로와 존 브라운의 서로 다른 사랑 방식을 통해 어떤 사랑에 더 끌리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티타가 ‘자신의 정열에 불을 지펴줄 누군가를’ 남자에게서 찾지 않고, 자신 내부에서 찾았다면 어땠을까. 단지 막내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유를 억압당하며 살 수는 없다고, 마마 엘레나에게 당당하게 맞서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독립했다면 더 통쾌하지 않았을까. 끝내 놓지 못하는 첫사랑의 불꽃, 그 강렬한 불꽃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건 비단 나만의 느낌일까. 어쩌면 윤리와 도리 따위 매이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겨보는 것, 그것이 티타에게 진정한 자유와 절정의 쾌감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문학에선 옳고 그름 이전에, 인간 본연의 욕망에 공감하고 불행에 연민하는 것. 그것이 더 귀한 감상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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