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주 Dec 14. 2020

두 팔로 물구나무 서있는 나무처럼 -『채식주의자』

(한강/창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2016년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로 꼽히는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 당시, 상 받은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을 구입한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형부와 처제의 성행위, 자기파괴의 과정을 거쳐 죽음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기이하기 때문이다.      


장편소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이렇게 세 중편이 연작소설 형태로 이어져 있다. 세 중편은 각각 독립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는 동시에, 하나의 긴 이야기를 이룬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의 남편을 통해,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형부를 통해, <나무불꽃>은 영혜의 언니인 인혜를 통해, 영혜를 보여준다. 시점과 화자를 달리하여 같은 인물, 같은 사건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모자이크로 완성된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이 방식은 사건과 인물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주인공인 영혜 뿐 아니라, 영혜의 남편, 영혜의 형부, 영혜의 언니 등 다른 인물들의 욕망과 상처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면서 가족들과 갈등이 생기고, 영혜의 아버지는 고기를 강제로 먹이려한다. 영혜의 형부는 영혜를 예술적 영감과 열정의 대상으로 욕망하다가 결국 성적으로도 욕망하고 처제인 영혜와 관계를 갖는다. 그의 열정을 자극시킨 것은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있는 몽고반점이었다. 아마도 몽고반점은 영혜가 갖는 순수함과 신비를 상징하는 듯하다. 영혜를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애증 속에서 영혜를 이해하게 되는 이는 결국 영혜의 언니 인혜였다.  

    

다소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장면들과 사건들로 인해 독자는 당황하고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예술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결국은 처제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듯한 형부의 이야기는 독자의 윤리적 경계를 건드려 불편함을 준다. 그러나 영혜가 채식을 고집하는 것을 넘어 자기파괴의 단계까지 가는 이유는 명백하다. ‘폭력성’에 대한 저항이다. 소극적인 듯하지만 극렬한 저항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들에서는 ‘폭력성’에 대한 저항과 세상의 모든 폭력성에 대한 질문이 반복하여 등장한다. 여성 주인공의 폭력성에 대한 저항은 자기 안으로의 침잠이나 자기파괴의 결과로 나타나곤 한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지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p.61)     


영혜는 다른 생명을 해하지 않기 위해 모든 동물성 섭취를 거부하다가 결국은 동물이라는 자신의 존재론적인 거부까지 하게 되며 식물이 되고자 꿈꾼다. 그리하여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오직 물과 햇볕만을 받아들이며 물구나무서서 나무가 되고자 하는 여자다.     


표면적 사건들과 인물들의 행동을 마음 깊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영혜의 행동은 극단스러운 데가 있다. 그러나 작가가 우리에게 질문하고 깊이 끌고 가려는 주제가 무엇인지 짐작을 하고나니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성에 상처입고 저항하다 그 저항의 칼끝으로 스스로를 찌르며 서서히 경계 저 너머로 가는 영헤의 모습은 처연하고 슬프다. 동생을 아프게 지켜 볼 수밖에 없지만 아이를 양육하며 일상성의 삶을 사는 인혜의 이야기도 곱씹고 곱씹게 된다.      


 이 소설에서는 이미지의 대립이 선명하다. 동물성과 식물성, 일상성과 꿈의 대립이 그것이다. 일상성의 삶을 사는 인물은 인혜와 영혜의 남편이다. 꿈의 편에 있는 이는 영혜와 영혜의 형부다. 영혜가 좇는 꿈은 나무와 꽃이다. 인혜의 남편 즉 영혜의 형부가 좇는 꿈은 새와 나비로 표현된다. 이렇게 본다면 인혜의 남편이 영혜에게 매혹되고 욕망하는 이유가 이해된다. 그가 좇는 이상과 꿈이 영혜에게 있고, 영혜 몸에 그린 그림 속에 있다. 그가 영혜와 성관계를 갖는 것은 단지 여성으로서의 영혜의 몸을 탐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예술과 성적 욕망을 넘나드는 묘사는 탐미주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 서 있어." (p.173)     


 벌 받듯이 땅을 받치고 물구나무 서 있는 나무의 모습은 영혜의 모습과 겹쳐지고, 그 모습은 또 왠지 작품마다 이토록 진지하고 무겁고 아프게 내면으로 파고드는 작가 한강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근원성에 대해 일관되게 탐색하는 한강 작가를 존경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둠은 어둠을 알아본다 - 『희랍어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