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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주 Jan 04. 2021

아름다운 조우를 꿈꾸며-「스펙트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허블) 수록 소설 (2)


  과연 외계인은 있을까, 라는 궁금증은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던 질문이다. 영화 <콘텍트>에는 “이 넓은 우주에 우리 뿐이라면 그건 굉장한 공간의 낭비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무한한 우주에서 지적생명체가 인간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다. 이 유명한 대사로 인해 외계생명체에 대한 막연한 상상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딘가에 있는 존재’로 바뀌었다. <브이>나 <에일리언> 같은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지구와 거의 비슷한 환경에서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김초엽 작가의  「스펙트럼」은 그러한 상상과 연결된다. 이 소설을 읽고 오래전 영화 <콘텍트>가 생각났다. 여성 과학자가 홀로 외계인과 조우하고 돌아오는 경험과 sf소설임에도, 그 속에 들어있는 잔잔하고 따뜻한 정서가 닮아있다.       

 

「스펙트럼」에서 화자는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한다. 할머니의 이름은 희진. 젊은 시절 그녀는 생물학자로 외계 생명체를 탐사하기 위해 탐사선에 올랐다가 광자 추진체의 결함으로 실종된 지 40년 만에 지구로 돌아왔다. 그녀는  외계인과의 첫 조우자라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외계의 지성체를 조우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고, 그 행성의 정보에 대해 일절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도 그 외계 생명체들이 보여준 친절함, 배려, 상냥함, 보살핌에 대한 희진의 보답이었으리라. 희진이 그 행성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런 도구도 없는, 무방비상태의 연약한 존재였다. 희진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지만, 지구인들이 온갖 과학 도구들을 가지고 그 행성에 당도한다면, 그들의 온전한 삶과 안전은 위협받을 것이다. sf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외계인의 지구침공은, 어쩌면 지구인의 외계행성 침공이 될지도 모른다. 유럽인들이 가져간 세균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이 몰살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세균과 바이러스가 그들에겐 치명적일 수 있으리라.     


  희진이 머물렀던 행성의 모습은 흡사 원시 지구의 모습과 흡사한 느낌이다. 그 행성의 지적 생명체는 동굴에서 무리 생활을 하며 무기를 들고 수렵, 채집생활을 한다. 그들 중 기록을 담당하는 ‘루이’라는 개체는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잎종이에 색체언어로 기록을 한다. 희진을 보살피는 첫 번째 루이가 죽자, 그의 영혼을 이어받은 두 번째 루이가 오고, 그도 죽자, 세 번째 루이가 희진을 보살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분절된 개체이다. 희진은 한 루이가 죽고 다른 루이가 다시 그 자리를 채울 때 연속적이지 않은 두 자아 사이의 어긋남을 목격했었다. 영혼은 이어질 수 없다. 그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다른 루이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같은 루이가 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 루이들은 단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들은 기록된 루이로서의 자의식과 루이로서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경험, 감정, 가치, 희진과의 관계까지도. (p.91)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오묘하고 매력적인 설정이다. 희진은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는 루이의 연속성과 분절되지 않은 루이를 믿기 힘들었으나, 믿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했다. 그들의 수명은 3~5년으로 짧다. 루이가 오직 물감으로 기록을 하고 희진을 보살피며 그 짧은 생을 살다가고 나면 다음 루이가 그 전 루이의 기록을 본 후 연속적인 루이가 되어 또 희진을 보살핀다. 보살핌을 받는 자보다 보살피는 자들의 생이 더 짧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마음으로 소통을 하고 관계를 이어간다.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니, 작가는 인간보다 수명이 긴 거북이를 키우는 사람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희진과 루이들과의 관계를 보면 어떤 댓가도 보상도 없이 보호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깔개 위에 몸을 뉘었을 때 희진은 문득 울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 (p.82)     

 

 루이와 몇 가지 신체동작을 공유할 수 있게 된 희진의 독백이 절절이 와닿는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외계행성에 홀로 떨어진 희진의 외로움과 언어가 통하지 않는 타자와의 소통에서 오는 감동이 전해진다.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그 마음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있는 감정이 아니다. 반려동물과의 관계에서도 흔히 경험하지만, 외계의 생명체와도 얼마든지 가능한 감정이다.      


 sf소설이건, 공상과학소설이건 그 속엔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있다. 40년만에 지구로 돌아온 할머니 희진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곳에서 그들과 나눴던 우정과 친절, 환대였을 것이다. 그리고 짧게 머물다 떠난 그 모든 루이들, 그 모든 생명체들, 그 존재 자체였을 것이다. 우리가 정말 외계인과 만난다면, 희진과 루이들처럼 아름다운 '조우'였으면 좋겠다.      

  

 우주가 이렇게 넓디 넓고, 외계 생명체들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거리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에 우리와 유사한 존재가 사는 게 확실해보이지만, 서로 침범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주의 섭리이자, 신의 섭리가 아닐까. 모든 존재는 각자 고유의 파장과 굴절에 따라 분산되어 빛나는 스펙트럼 같은 존재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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