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 마인드 (3) 세탁실
세탁기 앞에서 쪼그리고 싶지 않아
우리 집 빨래는 내 담당이다. 남편이 주로 식사를 담당하는 포지션이라면 나는 빨래와 관련된 일을 주관(?)한다. 이전에 살던 집은 세탁기가 좁은 곳에 있어서 매번 세탁기나 건조기를 돌릴 때마다 내 몸을 약간 웅크려야만 했는데, 그래서인지 빨래 한번 돌리고 나면 '아이고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서 새 집의 공간을 계획할 때 ‘내 몸하나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세탁 공간’은 꼭 사수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인테리어 업체 몇 군데 상담받으면서 우리의 세탁실 니즈를 어필하고 생각해 두었던 아이디어를 신나게 말했다. 베란다에 세탁기를 놓되, 배수를 침대방 화장실로 연결해서 빼는 건 어떨지 등 나름 레퍼런스도 찾아보고 실현 가능할 것 같은 몇몇 안을 제시했지만, 인테리어 업체 쪽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유튜브에서 본 인테리어 사장님들은 다 된다고 하던데, 현실에서는 대부분 잘못 시공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더 강조해서 얘기했다.
탐탁지 않아하는 내 표정을 본 걸까? 미팅하던 사장님이 무심한 듯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깐, 다른 집은 여기가 창문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 이 집은 여기가 벽이라는 거죠?
네, 맞아요. 그 라인만 구조가 약간 다른 것 같아요.
그럼 아마 이 벽은 내력벽이 아닐 확률이 커요.
아.. 그래요?
만약 진짜 이 공간을 잘 써보고 싶으면, 벽을 세탁기 깊이만큼 안쪽으로 밀어서 워시타워 자리로 만드는 것도 방법이죠.
아! (유레카!)
미리 말하자면, 우린 이 업체랑 계약을 하진 않았다.(아이디어가 좋아서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결국 탈락;)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우리 마음에 쏙 들었고, 가능성 여부만 확인되면 그렇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래서 인테리어 업체를 선정하기 전에 여러 군데 상담을 해야 된다고 하는 건가? 발품 팔며 돌아다닌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집 계약을 하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구청에서 도면을 떼어다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집 도면인데, 우리 집 도면이 아니다! 우리 집 도면이라면 이 자리에 창문이 없어야 되는데, 구청에서 가져온 도면에는 창문 방향이나 여러 가지 디테일 요소가 우리 집이랑 달랐다. 이럴 수 있는 건가?
인테리어 업체 말로는 시공 당시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약간씩 변수가 생길 경우, 도면에 반영되지 못한 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아파트는 단일 평형인데 'ㄱ'자로 꺾인 우리 라인만 아무래도 현장에서 변수가 있었던 것 같다고... 그래서 결국 이 벽이 내력벽인지, 아닌지는 공사 시작하고 두들겨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한다.
오. 마이. 갓!
그래도 자기가 예상컨대 우리가 계획한 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해주셨으나, 어쨌든 100% 장담할 수 없기에 인테리어 방향을 2가지 버전으로 만들어두기로 했다. 벽을 철거하고 세탁기 깊이에 맞게 다시 만드는 A안, 철거가 불가능한 경우를 대비한 B안. 세탁실과 멀티룸이 붙어 있어서 철거 여부에 따라 멀티룸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공사 시작하는 날까지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철거, 꼭 돼야 하는데.
드디어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는 날 아침이 되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현장에 와보니. 오! 시원하게 뚫려있는 벽! 됐다 됐어! 가망이 없던 공간을 드디어 살릴 수 있겠군!
사실, 세탁실이 팬트리 역할도 할 수 있게 선반을 설치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있었으나 보일러실과 연통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이 공간에 더 이상의 욕심은 무리였다. 죽어가는, 가망 없던 이 공간을 이 만큼 살려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세탁기 다 돌아가면 바로 건조기로 옮길 수 있고, 자연 건조시킬 수 있는 미니 건조대도 설치했으니 세탁실로는 문제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빨래 활동’을 하는 데 있어 공간이 충분하니,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어떤 공간보다도 고민을 많이 했고 애타며 만들어낸 공간이라 그런지, 살면서 제일 정이가고 마음에 드는 공간이 바로 세탁실이다. 남편은 내가 이 공간을 좋아하는 이유가 분리수거함 때문이라고 한다. 계획한 것도 아닌데 분리수거함이 마치 자로 잰 듯 쏙 들어가 주니, J형 인간의 애정이 갑자기 폭발하게 된 것도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Only One이라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이 아파트 단지 내에 이런 세탁실을 갖고 있는 집이 있을까? 장담하건대 지금까진 없다. 이건 우리의 니즈에서 시작되었고 그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낸 'made by us'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공간을 사랑하는 진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집이 특별한 이유? 세탁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