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Sense8>
오랜만에 시리즈 드라마가 보고 싶었다. 로맨스-멜로 말고, 발랄한 거 말고, 공포 말고, 다큐 아니고.. 결국 나는 내 오랜 취향대로 SF 혹은 판타지물을 찾기 시작했고 <Sense8>을 발견하고는 딱이다 싶었다.
감독은 워쇼스키 자매, 8명의 메인 캐릭터 중 배두나가 포함되어 있으며 <매트릭스>와 <바빌론5>의 제작팀이 선보이는 본격 SF 시리즈. 워쇼스키 자매나 배우 배두나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매트릭스> 영화를 좋아하고 '본격 SF시리즈'라는 소개에 나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1화 정주행 시작
1화를 보는 내내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그냥 끌까.' '다른 걸로 갈아탈까.' '조금 더 보면 이해되려나.'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SF나 판타지 시리즈물을 볼 때, 첫 화는 항상 이렇게 얼떨떨하면서 봤던 것 같다. 나의 최.애 <반지의 제왕>도 '반지원정대'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정말 최악이야!'를 외쳤고 한국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도 첫 시즌 보면서 '아.. 제작비 어떡하냐..' 하면서 봤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내 인생 드라마 리스트에 있으니, 이번에도 참아보겠다는 마음으로 버텨보기로 했다.
그리고 역시나. 내 예상은 맞았다. 시즌 1의 3화가 넘어갈 때쯤부터 스토리도, 나의 이해력도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몰입할 수 있었다. 지구 어딘가에 나의 감정과 느낌을 공유하는 사람이 7명이 더 있다면 어떨까. 심지어 각자 가진 능력을 서로 공유할 수 있고, 언제든 서로의 생활 속으로 방문(visit)할 수가 있다. 그들 사이엔 물리적 거리가 전혀 문제 되지 않으며 심지어 키스도, 섹스도 가능하다.
와. 이렇게 되면 장거리 연애 따위 두렵지 않겠는걸?
내 7명의 감각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언제든 여행이 가능하겠네?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하며 살 수 있겠어.
이런 1차원적인 감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유치해서 스스로 부끄러워질 때쯤, 드라마는 본격적으로 메인 주제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감정과 느낌, 몸을 공유하는 인간을 '호모 센소리움(일명 센세이트)' 이라고 부르고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종족으로 구분한다. 이런 신인류의 등장이 두려운 호모 사피엔스의 비밀 조직-BPO는 그들을 사냥하고, 센세이트들은 자신들의 힘을 빼앗으려는 그들과 맞서 싸운다.
센세이트는 여러 그룹이 존재하고 같은 그룹원들은 모든 감각을 함께 공유하는데, 특히 서로의 '고통'을 가장 크게 느낀다. 누군가 공격당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면, 나머지 7명도 동시에 그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만약 나와 연결된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통까지 함께 느끼게 된다면 어떨 것 같은가. 더 이상 나한테 신경 끄라고, 너나 잘 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룹원들은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서로 응원하고 도우며 살게 되고 너의 삶이 곧 내 삶이요, 내 삶이 곧 우리의 삶이 된다. 완벽한 '공감'이란 이런 게 아닐까. 아마도 워쇼스키는 '공감'이 무엇인지, 그 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8명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 특별함이란 마법 같은 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일상에서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특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능력이 필요한 순간에 남을 위해 발휘될 때는 마치 초능력과 같은 힘을 지니게 된다.
위험에 빠진 케냐의 카피우스를 위해 서울에 있는 격투기 선수, 선이 대신 싸워주고 그룹원들의 차단제를 만들기 위해 인도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칼라가 나선다. 그룹원들이 의심스러운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현직 경찰인 윌이 나서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해주고, 이들이 함께하는 모든 작전은 전직 해커, 노미가 백업해준다. 무뚝뚝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독일의 볼프강을 위해 멕시코의 배우로 활동하는 리토가 재치 있게 대신 받아쳐주고 최고의 DJ, 라일리 덕분에 모든 그룹원들은 같은 음악을 함께 듣고 춤추며 격려하고 위로한다.
모든 위기의 순간마다 각자의 능력으로 서로를 돕는 것은 물론, 가장 괴롭고 힘들 때 그 고통을 함께 나눈다. 몸은 지구 곳곳에 흩어져있지만 감각은 연결되어 있기에 원하면 언제든지 서로 방문할 수 있다.
이쯤 되니 헷갈리기 시작한다. 과연 어디까지가 '나'인 것인가. 극 중에 리토의 남자 친구-에르난도의 말처럼 '자아'의 개념이 '나'이상으로 확장된 듯하다. 그룹원들과 분리해서 단독으로 '나'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것이다.
드라마는 매력 있는 8명의 주인공들이기에 그들이 함께하는 세상이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그려지지만, 나와 상극인 그룹원들이 존재하고 차단제를 먹지 않는 이상 그들과 내 삶의 일부를 공유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 그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끔찍할 수도.
어쨌든 드라마 상에서는 환상적인 일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각 나라별로 보이는 아름다운 배경과 문화가 담긴 장면들은 그 스토리를 더욱 빛나게, 더욱 슬프게도 한다.
내 경우, 각 주인공들의 다양성을 통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도 들었다. 인종, 성 지향성, 성 정체성, 성별, 각국의 문화 등 현실에선 사람들이 구분 짓기 좋아하는 주제들을 드라마 안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다룬다.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여성, 흑인의 삶, 문화, 차별, 사랑을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그려내고 있어서 보는 내내 좋았다.
또 하나, 내가 한국인이라 조금 더 재미있었던 건 배두나 이외에 상당히 많은 배우들이 특별출연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이경영, 이기찬, 윤여정, 명계남, 마동석, 차인표, 정두홍, 홍석천, 그리고 손.석.구... 아무 배경지식 없이 보다가 숨이 멎을 뻔했다. 다양한 국가가 배경이 되다 보니, 한국 배우가 한국 사람으로 출연하지만 모두가 영어로 연기를 한다는 점이 포인트다. 영어와 연기가 모두 다 되는 분들이 모인 느낌이랄까.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선물같이 한 사람씩 등장하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18세 영화답게 배드씬도 파격적이었고, 몇몇 고어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좀 힘든 장면도 꽤 있었다. 중간에 출산 장면이 있는데... 나는 애를 낳아본 사람인데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적나라할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다른 팬분들은 인상 깊은 장면으로 손꼽기도 한다니...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르긴 한가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잔상이 기억에 남는다. 이야기를 되짚게 되고 부분적으로 다시 보고 싶은 구간도 있는 걸 보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드라마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