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생각하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오래된 기억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며칠 전, 독감이 다 낫지 않은 채 등교한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가 “5일이나 결석했으니 학교에 나가야 한다” 고 말했다며, 그 말에 따라야 한다는 듯 아이는 다부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기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아이 얼굴은 붉게 달아 있었고, 아이의 말이 길어질수록 눈매는 더 굳건히 좁혀졌다. 교사의 말보다 아버지의 말이 더 우선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어느새 나는 오래전 이 아이만큼 나이를 먹은 어린 나를 함께 보고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배가 아파 조퇴를 하고 집에 간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아파서 돌아온 나를 엄마가 잠시라도 품어주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를 맞이한 건 “다시 학교 가서 공부 다 하고 와”라는 아주 엄한 호통뿐이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혼까지 나니 더 슬퍼서, 학교로 돌아가는 길 내내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나는 그저 괜찮냐는 한마디, 아픈 배를 쓸어주는 손길 하나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생계를 붙드는 일상 외에 다른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이였던 나는, 아픈 몸은 엄마의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뒤로는 아파도 꾹 참았다. 그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통증은 이제 유년 시절의 딱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프면 조퇴하고 집에 가도 된다는 내 말은 듣지 않은 채 ‘아버지의 말’을 지키려 애쓰던 그 아이의 모습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렸는지 모른다. 아픈 몸보다 어른의 뜻을 거스르는 게 더 두려웠던 그 표정까지도, 어린 나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루분 약이 남아 있어 내일 등교해도 되겠냐는 문의였다. 나는 기꺼이 괜찮다고 말하며, 아이가 결석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같으니 마음을 좀 풀어주시길 조심스레 부탁드렸다.
그 말은 교사로서 아이에게 건넨 말이기도 했지만, 오래전 어린 나에게 보내는 말이기도 했다. 아프면 쉬다가 완전히 나아서 학교에 오면 된다는 말. 그때 나에게 아무도 해주지 못했던 바로 그 말을 나는 지금 우리 반 아이에게 건네고 있었다.
“이 세상에 한 인간을 낳아 기르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p.240)라는 문장을 떠올려 본다. 어머니가 내게 차갑게만 보였던 건 무정해서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느라 어쩔 수 없이 자식을 향한 따뜻함을 뒤로 미뤄야 했음을. 그 사실을 이해하고 나니, 어린 내가 품었던 서운함은 어느새 애잔함으로 바뀌었다.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였음에도 돌봄이 닿지 않았던 그 순간의 상처가, 이제는 엄마가 감당해야 했던 생의 무게를 떠올리며 천천히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