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솔로 부대원이 가뭄에 콩 나듯 연애를 하면 일어나는 일 3
이 글은 제 연애 흑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부산 사람은 화내지 않습니다.
말투가 그럴 뿐.
그 당시 전 남자친구 새끼... 아니 아니 그 당시 남자친구는 공대생 출신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무엇이든 똑 부러지고 조리 있게 설명하는 모습이 참 멋있었고 남자친구는 그 너머의 세상에 살고 있는 나를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했었다. 상대방의 꾸준하고 우직한 돌직구 직진 덕에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만나서는 안 되는 환장의 조합이었다. 그때 관둬야 했지만. 우린 서로가 가지지 못한 점에 이끌려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순조로웠다.
나는 누군가가 내게 그리도 합리적인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안해 주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고 남자친구는 내가 들려주는 세상의 다른 이야기들. 그러니까 자신이 전공한 것 외에 알지 못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우린 서로에게 미지의 세계였던 셈이다. 서로가 아니었다면 탐험을 시작하지도, 시작할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을.
애석하게도 나란 인간은 한번 연애를 시작하면 콩깍지가 잘 벗겨지지 않아 한 사람을 오래 만나는 편이었기에, 자연스레 연애의 반환점이라고도 불리는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했다. 키 크고 멀끔하게 생긴 데다 투 머치 토커인 우리 집사람들에 비해 말수까지 적은 남자친구의 모습을 부모님은 너무도 좋아하셨다. 나와 전화 통화를 할 때면 나의 안부보다 남자친구의 안부를 먼저 물어보는 통에 이참에 그냥 그 집이랑 자식 바꾸자는 너스레 소리를 할 정도로.
대충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것들을 결정하자며 만난 어느 날.
드디어 우리 관계의 종지부를 찍을 그 질문이 남자친구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튀어나왔다.
"결혼하면 일 관두는 거지?"
만나자마자 보기 드문 개소리를 하네. 신종 결투 신청법인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열심히 그 말을 꿀꺽 삼키며 왜 그래야 하냐고 물었다. 눈에서 이미 레이저가 발사되고 있었지만. 이놈은 그것도 알지 못한 채 너무도 담담하게 종지부를 찍다 못해 확인 사살까지 했다.
"나도 석사고 너도 석사인데, 연봉은 네가 내 반 토막 밖에 안되잖아. 그러니까 적게 버는 사람이 그만둬야지"
사람을 어떻게 접어야 효율적으로 잘 접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나는 말이었다.
사실 할 말은 없었다. 남자친구는 공대생. 그것도 전(기, 전자), 화(학), 기(계) 전공이었고 석사를 따고 연봉 협상을 할 때 깽판만 치지 않으면 연봉 5천은 우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바이오 업계에 종사하고 있었고, 바이오는 박봉으로 유명했다. (석사 기준 초봉은 보통 2,400~2,800. 삼대가 덕을 쌓아 운이 좋으면 영혼 뽑아먹힐 각오로 3,000초반)
내가 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꼈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정말 크고 무거운 둔기가 되어 내 뒤통수를 가격하는 순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아무리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장땡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은 점점 극으로 치달았다.
"나도 내 인생을 바쳐서 여기까지 온 건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것도 그렇게 쉽게??"
"아니 맞잖아. 어차피 아기 낳고 하면 집에 있을 건데 석사 박사 그게 뭐가 중요해. 돈도 많이 벌건데."
"...................??누가 집에 있는대? 나 일 할 건데?"
"그 돈 벌거면 그냥 애 낳고 알바나 해."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는 내가 왜 결혼을 하고도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몇 번이고 말했었다.(커밍 쑨) 그때마다 매우 좋은 가치관이라며 우쭈쭈 거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야 한다는 말이 겨우 저딴 말이라니. 남자들은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여직원들은 야근을 해야 하는데 자기 부인은 빨리 와서 밥을 하고 있어야 한다더니 그 꼴이 딱 네꼴이구나. 싶었다. 이성적으로 모든 사물을 보는 것만 같던 그의 눈은 이미 자신과 나의 인생의 종착역을 부등호의 방향 만으로 결정지어버린 병신의 눈이 돼어 있었다.
나는 그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조율을 할 수 있을까.를 두고 대화를 이어나가려 해보았지만. 우리가 싸우고 있는 이 주제는 내게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최후의 보루였지만 그에게는 내가 제일 먼저 기꺼이 넘겨줘야 할 제물 같은 것이었다. 대화는 그렇게 돌고 돌고 돌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대화의 끝에 결정을 내렸다.
"평생 그렇게 0이랑 1만 있는 세상에서 살아. 난 나갈래."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이성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에서 병신의 눈이 되더니 당황함으로 가득 찬 눈이 된 그를 내버려 두고 카페에서 자리를 떴다. 그는 너무 놀라 한참이고 멍하니 있더니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되었는지 나를 미친 듯이 따라왔다. 자신이 내린 판단은 우리가 가진 조건을 수치적으로 따져봤을 때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왜 자신이 내린 이 '합리적인 반응'에 내가 이런 반응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눈초리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내가 가진 가장 큰 세계였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탐험하기가 싫어진 또 다른 미지의, 다른 낯섦을 가진 세계가 되어 있었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나의 반응은 그에겐 아마 숫자 2처럼 느껴질 것이었다. 0과 1만이 존재하는 그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 해서도 안 되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그는 3의 감정도 느끼게 될 것이고, 한 달 뒤엔 4라는 감정도 알게 될 것이다. 1 더하기 1이 반드시 2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즘에는 그는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겠지. 그전까지는 고생고생 생고생을 하게 될 그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가만히 쓰다듬어주고. 나는 다시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 너머로 대로변에 주저 앉아 울기 시작하는 전 남친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는 내일 배워야 했을 숫자 3의 감정을 미리 당겨 오늘 배우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의 TMI]
1. 공대남 킬러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앞으로 내가 공대남 만나면 아오.
2. 연애상담 하는 것 좋아하지 않음. 나도 여자지만. 여자들 진짜 답정너 정신 상태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라.
3. 페미니즘이나 남녀 분열을 조장하는 글이 아님.
4. 새벽갬성으로 쓰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으나 일어나자마자 김치전 구워먹음. 하...귀신 들렸나 진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