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작
오늘의 날씨도 전국이 대체적으로 영하 15도로 매우 추울 것으로 예상되며 치지직 내일 또한 전국적으로 많은 눈과.. 치지지직
이놈의 라디오가 또 고장이 난모양이다.
'작년이면 지금쯤 연탄 땔 걱정 없이 일을 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일자리도 없어 연탄을 땔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이제 우리 가족은 둘이 아닌 셋이다. 딸은 얼마 전에 태어났다. 아내도 산후조리를 끝내고 아이도 젖을 떼고 이유식을 시작할 때였다.
IMF 때문에 회사에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 나 같은 말단 사원은 바로 잘렸고 지금은 막노동을 하여 근근이 먹고 산다.
'우리 부부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 셋이 힘겹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아이를 고아원에 맡길까?'
나는 하루하루 끝없는 고민과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친구 녀석을 만났다.
한잔 두 잔 술을 들이켜다가 마침내 나는 나의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지금 둘이 먹고살기도 힘든데 아이까지 생겨버렸어. 어떻게 하지? 나는 아이가 나처럼 되길 바라지 않아. 그래서 가까운 고아원에 맡길까 생각 중이야"
그 녀석은 버럭 화를 내며 나에게 말했다. "야, 너 미쳤냐? 니 애를 왜 못 책임져? 네가 가장이잖아. 네가 걔 아빠잖아! 그럼 네가 책임져야 되잖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정말 어쩔 수 없다. 아니 어쩔 수 없다고 믿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누가 계속 고아원에 둔다 그랬어? 아님 평생 고아원에 맡기겠대?
지금 내 꼴을 봐. 일자리도 없어서 막노동으로 근근이 둘이 살아가고 있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나도 일자리를 찾고 안정되면 그때 찾아오겠고!"
친구도 나의 말을 듣고 수긍을 하는지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의 태도는 누그러졌다.
“하긴 지금 IMF다 뭐다 하면서 다들 실직하고 어렵게 살고 있지... 하지만 아이를 다른데 맡기는 건 정말 아냐.”
그의 태도는 누그러졌지만 하지만 그의 주장은 변함없었다. 하지만 나의 주장도 변함없다.
“내가 내 딸을 떼어놓을 생각을 하면 밤에 잠도 오지 않아. 하지만 나랑 같이 사는 것보다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나와 같이 사는 것보다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제발, 부탁해...
어린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설 알고 있니?”
그는 나의 애절한 부탁에 포기했는지 넌지시 말을 건넨다.
“에휴...정 그러면 내가 아시는 분의 친구분이 지방에서 서당을 하신다는데 거기로 데려가는 게 어때?”
그의 말은 나에게 희망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서당에 관해 자세히 물어봤다.
‘내 아이를 맡겨도 될까?’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확실히 내 사정에는 거기보다 좋은 곳은 없을 듯했다.
일이 없어 쉬는 날에 나는 아내에게 일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친구가 소개를 해준 그 서당에 찾아가 보았다.
고속버스를 타고 두 시간쯤 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 한 시간쯤 가니 산에 도착했다.
산에서도 꽤 올라가서야 서당으로 보이는 한옥의 지붕이 보였다.
서당의 앞쪽에는 계곡이 얼어붙어 있고 뒤로 보이는 침엽수 가지는 아직도 푸른 생기를 머금고 있으면서도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는 눈처럼 하얀 모시 차림에 보라색 두루마기를 입고 긴 수염이 멋지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두 눈은 호수처럼 깊고 투명했다.
그는 자신을 이 서당의 훈장이라고 소개를 했고, 나도 내 소개를 간단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에게 친절히 차를 대접하고 여기를 온 용건을 물어봤다.
“이 깊은 산중까지 어떻게 오시게 되셨나요?”
그의 말은 간결하면서도 용건만을 얘기하였다.
“예, 초면에 죄송한 말이지만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나의 사정을 얘기했다.
“그래서 그런데 여기에 아이를 맡겨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훈장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아이는 언제쯤 데려가실 겁니까?"
나 또한 곰곰이 생각했다. 너무 길게 맡기면 그가 거절을 할 것이고 너무 짧게 맡기면 내가 사정이 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가 사정이 언제 펴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길어도 5년 이내에는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훈장은 다시 잠시 고민하다 나에게 말을 하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댁의 아이를 돌봐드리겠습니다.”
훈장은 흔쾌히 내 부탁을 승낙하였다.
“정말입니까, 훈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
그는 나의 말을 듣다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중간에 사정이 나아지든 나아지지 않든 딱 5년 후에 데려가시는 겁니다.”
훈장의 이 말은 의미심장했지만 나는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예, 물론입니다 그럼 다음에 아이를 데리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기쁘게 얘기했다. 훈장도 또한 인자한 미소를 띠며 나를 배웅했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처음 아내는 내가 예상한 대로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며,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이를 키우자고 나에게 얘기했다.
나는 친구와 만났을 때의 얘기와 훈장님과 만나서 얘기했을 때의 얘기를 모두 전해줬다.
아내는 처음에는 수긍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아내도 수긍을 하고 나에게 서당에 관한 얘기와 훈장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또 버스비와 아이 옷을 사기 위해 며칠간 열심히 일을 했다.
나와 아내 버스표를 구입하고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서 다시 서당으로 향했다.
이제 그 서당의 앞이다.
앞에는 그전처럼 계곡이 얼어붙어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직도 물이 흐른다. 뒤에는 소나무들의 가지에는 눈이 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 가지의 잎은 아직도 푸른 생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문 앞에서 마지막 고민을 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아이를 떼어 놓아야 한다는 차가운 현실이 두터운 코트 속으로 들어와 나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있다.
나의 아내도 마찬가지인 듯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이...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내의 손은 차가웠다. 하지만 이내 따뜻해졌다. 아내는 눈물을 그치고 나를 바라봤다. 아내의 눈에는 그냥 가자는 의미가 섞인 듯했다.
하지만 내 아이만큼은 나 같은 고통을 받지 않고 여기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아내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잠시 머뭇거렸다.
“여보 근데 우리 아이는 아직 갓난아이잖아 그럼 아무래도 신경도 많이 써주어야 할 텐데 훈장님 혼자서 그걸 하실 수 있으실까? “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내와 나는 깜짝 놀랐다. 훈장님은 그 전과 같이 인기척도 없이 우리의 뒤에 서계셨다. 아마 외출을 하시고 들어오신 것 같았다.
일단 나는 나의 아내의 소개를 먼저 하였다.
“예, 훈장님. 이 쪽은 제 아내입니다.”
훈장님은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하셨다. 그리고 아내에게 훈장님을 소개했다.
“여보, 우리 아이를 맡겨주신다는 훈장님이셔.”
아내 또한 말없이 목례만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훈장님은 우리에게 궁금한 듯이 여쭤봤다.
“사실,, 아직 아이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서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나의 마음을 전했다.
“부모마음 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일단 날씨가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훈장은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아내와 나를 객실로 안내하였다.
잠시 후 어느 한 여자분이 차를 가지고 들어오셨다.
“이분은 누구 십니까?”
나는 그새의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여자분은 훈장님의 사모님이며, 훈장님을 도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한창 나누고 있을 때쯤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나와 아내는 당황하여 안절부절 거리며 거릴 때 사모님이 갑자기 아이를 안아 아이 등을 토닥 거리며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이는 점점 울음을 그치더니 이내 잠에 빠져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내는 그새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나 보다.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괜스레 눈물이 나온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저,, 그럼 저희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저희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내는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하였는지 놀람을 가다듬지 못하고 말하였다.
“하룻밤 자고 가는 거 아니었어? 그렇지 않다면 아이가 깨어나는 거라도 보고 가자 여보”
“난 도저히 아이가 말똥말똥 눈뜨고 날 바라보고 있는 걸 보고선 도저히 못 떠날 거 같아. 당신도 그렇지 않겠어? 아까 사모님 봤잖아 훈장님과 사모님을 믿고 우린 가자.”
아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끝내 내 말에 부응하지 않으며
“그래 알았어.. 저희 아이 정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라는 말과 눈물을 머금으며 뛰쳐나갔다.
이제 우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니, 아이가 없으니 일상이 아닌 일상으로 돌아갔다. 5년 동안 아이와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 없다.
하루하루가 역겨울 만큼 버티기 힘든 생활이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그날을 위하여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다행히 아시는 분의 친구분이 운영하시는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오늘은 월급을 받는 날이다. 한 달 동안 고생한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마치 공짜로 돈 번 듯이 신이 났다. 공장 근처에서 동료가 보였다.
그는 항상 웃고 있어서 공장 내에서 광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은 웃지 않았다. 공장 문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머리를 한 대 후려 맞은 듯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월급, 나의 노력, 나의 땀, 나의 아이만이 생각날 뿐이었다.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 공장 또한 IMF 때문에 부도가 났나 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솟아날 구멍은 없나 보다.
아내에게 오늘 회사가 부도났다고 말했더니 아내가 털썩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아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는 아내도 서당에 보내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 몰래 다시 서당으로 내려갔다.
서당에서 흐르는 시간은 서울과 다른 듯이 변한 것은 하나 없었다. 얼어붙은 채 흐르는 계곡 물과 눈에 덮여 있지만 생기가 있는 소나무까지도...
훈장님과 다시 대면했다. 나는 훈장님에게 또다시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탁을 했다.
“저... 훈장님, 염치없고 뻔뻔하지만 부탁을 한 가지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훈장님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나의 부탁을 안다는 듯이...
“제가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하지만 월급도 받지 못했는데 공장이 부도나는 바람에 저희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아내가 여기에서 학당일 도우며 살게 해 주시겠습니까?”
훈장님은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눈을 감으신 채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연신 감사하단 말을 하고 서당을 떠나 집으로 왔다.
다음날 나는 아내의 짐을 챙기고 아내를 서당으로 보냈다.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잘 지낼 것이라고 믿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아내를 보내고 나는 또다시 백방을 뛰어다니며 일자리를 찾아다녔지만 지금 있는 인원도 줄여야 하는 사정에 취직을 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또다시 인력시장에서 막노동을 하기 위해 모닥불 앞에서 매일 기다리고 가끔 일을 나갔다.
오늘도 힘들게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낡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는 아무도 없는 우리 집을 더욱 고독하고 외롭게 만들었다.
집에 들어서서 다시 녹슨 문이 닫히니 주변은 어두컴컴하고 인기척은 하나 없었다. 돈이 무엇이기에 우리 가족을 생이별시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나는 외롭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슬펐다.
나는 오늘만 오늘까지만 이라고 외치면서 눈물을 훔치고 잠을 청하곤 했다.
이제 날씨가 풀렸다. 지붕마다 매달려 있던 고드름도 사라졌고 건물과 길에 쌓여있던 눈도 녹았다. 나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시 서당으로 왔다. 서당은 겨울이 지나 봄이 되니 다른 세계에 온 듯 달라졌다.
얼어붙어 안에서만 흐르던 계곡은 어느새 녹아서 세차게 흘렀고 눈에 덮여있던 푸른 소나무는 어느새 눈이 녹아 위용 있는 자태를 뽐냈다.
나는 이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려 한다
대문의 힘찬 소리와 함께 아이의 밝은 미소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