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아 May 25. 2022

네 잘못이 아니야.

2022.05.19

정확히 일주일 전, 약속된 시간. 비밀의 양탄자로 들어가면 선생님이 나에게 처음으로 묻는 질문이 있다.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나는 선생님이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6회 차 상담인데 의례적으로 묻는 질문 치고는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꽤 길다. 무려 30분간이나 내가 한 주간 잘 먹고, 잘 자고, 어떤 생각들을 하며 지냈는지 체크하고 또 체크하셨다. 뻔하디 뻔한 질문 그리고 뻔하디 뻔한 대답. 나는 잘 못 먹었고, 잘 못 잤고,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바닷속으로 제 몸을 던진 신민아처럼 이번 생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지냈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다 불쑥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은아씨, 왜 매주 내가 같은 질문을 이렇게 반복하고 이 주제로 오래도록 이야기 나누는지 아세요?"

'내가 어떻게 알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현실 검증력. 은아씨의 현실 검증력을 보는 거예요. 지금 나랑 상담을 할 수 있는 상황인 건지 아닌지, 현실 검증력이 떨어지면 상담을 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현실 검증력이 있어야 나랑 어떤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눌 것은 나누고, 치열하게 싸울 것은 싸워보죠. 지금 은아씨의 현실 검증력을 점검하고 있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상담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현증 검증력이 있는 상태에서 해야 하는 거구나. 석사로 상담을 공부한 나는 정말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다.


그렇게 나의 현실 검증력을 30분가량 점검한 선생님은 불쑥 아빠에 대해 물었다.

" 은아씨는 '아빠' 하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지난 상담에서 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라는 소리를 들은 터라 이번에는 '생각'이 아닌 '감정'에 집중하려고 저기 창 밖 너머로 시선을 넘겼다. 그런데 느껴지지가 않는다. 어떤 감정도. 우리 아빠를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들어야 하는 건지, 다른 사람들은 '아빠'하면 어떤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어렵다. 그러다가 저기 배꼽 아래 깊숙한 곳에서 끌어낸 단어를 툭- 내뱉는다.

"무서워요."

선생님은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내가 한 말을 마구 적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마치 타당한 이유를 대야할 것만 같아서 아빠가 무서운 이유를 말하기 시작한다. 선생님의 손글씨가 더 빨라진다. 나는 앞의 말과 구색을 맞춰야 하니 아빠와의 즐거웠던 기억들도 많이 있지만 무서웠던 기억들만 꺼내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러다 문득 아빠가 나에게 했던 무서운 행동들을 내가 지금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스치며 지나간다. 순간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선생님은 마치 내 소름을 보았고, 그 소름을 잘 달래려는 듯 혼자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은아씨는 잘못이 없어."

소심한 반항주의자인 나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마음속으로 뒤따라 말했다.

'내 잘못이야. 나는 잘못이 있어.'

선생님은 마치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아니라고, 네 마음속에 들리는 그 목소리는 잘못된 목소리라고 일깨워 주려는 듯 선생님의 목소리를 점점 키워갔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 목소리도 따라서 조금씩 커졌다. 커지고 또 커지고 또 커지고...... 얼마나 커졌을까. 일단 정해진 시간이 있고 나는 이 양탄자에서 나와야 하니 수긍하는 척을 했다. '그래요. 내 잘못이 아닐 거예요.'라고......


수긍하는 척을 하는 내게 선생님은 삶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다. 삶과 삶은 마주한 손바닥처럼 맞닿아 있는데 그 두께가 종이 한 장 보다도 못할 거라고 하셨다. 죽음과 같은 삶에서 손바닥 뒤집듯이 휙-하고 뒤집으면 그게 또 다른 삶이라는 것. 선생님은 삶을 그렇게 설명해 주셨다. 문득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등 뒤에 한라산을 두고 바다를 보며 뱃멀미를 하고 있는 신민아에게 이병헌이 했던 대사가 생각이 났다. 

"나중에라도 사는 게 답답하면 뒤를 봐. 등만 돌리면 다른 세상이 있잖아"

그렇다. 나는 죽고 싶다고 이야기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격렬하게, 온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살고 싶은 거다.  아- 그런데 얼마나 더 아프고 지리멸렬한 시간들을 흘려보내야 손바닥 뒤집듯 확 뒤집어 '나 오늘 살아있기 너무 잘했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그날이 언제쯤 올까. 애달프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쁜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