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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아 Jun 01. 2022

싸우지 않는 나.

2022.05.26

병가로 쉬고 있는 나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우리 반에 오는 한 녀석의 과격한 도전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한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전화통화를 하는 내내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하루 종일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병가를 갑자기 들어가는 바람에, 아이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를 맞이해야 했다. 그 환경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도전 행동으로 마음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일이었을 것을 생각하니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선생님께도 죄책감을 느꼈다. 나 때문에 00이의 도전 행동을 혼자서 고스란히 감당하고 계실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힘이 드실까.... 미안하고 또 죄스러웠다. 그 전화 한 통으로 나는 오만가지의 소설을 써 내려가며 죄인이 된 나 자신을 꾸짖고 또 꾸짖었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마땅히 쓸 수 있는 권리를 쓴 것뿐이라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단칼에 내 죄책감의 고리를 끊어 냈다. 아이가 도전 행동을 하는 것은 내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발생하는 일이니 불가항력적인 일이고, 함께 일하는 선생님 역시 그것이 선생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니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구구절절 상담 선생님의 말씀이 맞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내 안에서는 '내 잘못이야. 내가 쉬어서 일이 이렇게 된 거야'라는 생각이 자꾸 올라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 꼭 학교에서 전화 온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별일 아닌 것에도 죄책감과 자책감을 자주 느낀다. 선생님은 나와의 대화 속에서 그런 나의 모습을 자꾸 꼬집어 냈다. 그리고 내 잘못이 아닌 것들을 왜 자꾸 '자기 책임화' 시키는 것인지 나와 죄책감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려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다. 선생님이 던진 질문들은 도끼처럼 날아와 그 연결고리를 내리친다. 그러나 연결고리가 어찌나 강한지 내 안에 나는 계속해서 '내 잘못이야. 그래 온전히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일부 내 잘못이 있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선생님과 대화가 이어질수록 내 안의 죄책감의 연결고리가 팽팽해짐을 느낀다. 


내 모습이 답답해 보였을까. 아니면 안타까웠을까. 선생님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은아씨 잘못 아니에요. 은아씨 잘못이 있다면 은아씨는 자신과 싸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뿐이에요."

아, 순간 귓가에서 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과 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에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렇다. 나는 우울하고 불안한 나와 싸울 마음이 전혀 없다. 싸우려 하기는커녕 우울함과 불안감이 너무 익숙해 그것들에 매일같이 젖어있다.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어제도 오늘도 우울함과 불안함에 나를 내어 맡긴 채 내 귀한 삶을 흘려보내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울이 내가 되었고, 불안한 게 당연한 삶이 되어버렸다. 기쁨, 즐거움, 행복은 기억 저편에 넘겨주었고, 매일이 어둠 속에서 사는 것 같다. 어둠 속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빛 속에 사는 것처럼 연기해야 하는 슬프고도 고단한 인생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슬프고도 고단한 인생.......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여기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설 마음 1도 없어요. 그러니 은아씨도 싸우세요."

선생님의 단호함이 고마웠고, 든든했다. 나만 준비되면 언제든지 곧, 우울 그리고 불안과 맞서 싸워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내게 책을 하나 소개해 주셨다. '감정은 습관이다'라는 책이었는데, 내가 느끼는 감정은 습관적으로 만들어진 감정일 뿐 진짜 내가 아니라는 내용의 책이었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외로움이라는 감정 모두 거짓이고 허상일 뿐. 진짜 내가 아니라는 말에 큰 위로가 되었다. 그것들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니. 감정도 습관이라 우울과 불안 대신 다른 감정으로 습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렇게 1시간 30분여간의 시간을 보내고 비밀의 양탄자에서 나왔다. 선생님이 해주신 말들이 자꾸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 말들이 내 주변을 돌아다니며, 휘청휘청 곧 쓰러질 것 같은 나를 바로 잡아 주는 것 같았다. 참 감사하다. 그러니 한 주간도 내 안의 죄책감과 잘 싸워보며 버텨내야겠다. 버터야겠다. 버텨질 테다. 그리고 싸우지 않는 나를 인지했으니 가만히 있지 않고 치열하게, 격렬하게 싸울 준비를 해야겠다. 내 세상에 빛이 스며들도록......작은 촛불 하나 켜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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