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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아 Aug 30. 2022

안녕? 아이야.

2022.08.18

선생님은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그리고 새하얀 백지와 곱게 깎인 연필을 내밀며 머릿속에 떠오른 어린 나를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종이의 왼쪽 귀퉁이에 조그마하게 나를 그려 넣었다. 어떤 표정을 그려 넣어야 할지 몰라서 아이의 뒷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마치 아이를 상자에 가둔 듯, 아이 주변에 네모를 둘러 그렸다. 


"그 아이는 몇 살 정도 되었나요?"

"중학교 1~2학년이요?"

"그 아이의 마음은 현재 어떤 상태인가요?"

"이 아이는 겁에 질려있고, 외롭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보여요."

"지금의 은아씨랑 많이 닮아있네요."

"........."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문 바깥쪽에서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게 노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놀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 나를 마주하는 것이 어떻게 느껴지나요?"


선생님의 질문에 하나, 둘 답을 하기 시작하면서 알 수 없는 곳에서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왜냐하면 흑심의 연필로 그린 작은 아이가 바보, 멍청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작은 상자 안에 갑갑하게 있지 말고 그냥 한 발자국 내딛으면 되는 것을.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장승처럼 서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만 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해할 수 없는 게 곧 나였다. 어린 '나'였고 지금의 '나'였다. 


상담실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의 새빨간 분노와 새파란 슬픔이 곧 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울 것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두 공기가 어색하게 맞물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아서 답답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답답한 공기를 가르며 선생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 아이가 문 안 쪽으로 들어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 같으냐고. 나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면 좋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 작업을 어른이 된 내가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어른이 된 내가 내 안에 어린 나의 손을 잡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줄 수 없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 더 나가 이 아이를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단칼에 싫다고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린 아이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겁쟁이다. 혹여나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30년 이상 꾹꾹 눌러온 감정들 그리고 눈물들이 왈칵 쏟아져 나를 쓸어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나는 울지 못하는 어른이고, 우는 것이 제일 싫은 어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싫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그린 어린 내가 보이지 않게 종이를 뒤집어 놓았다. 


선생님은 나의 상담 종착지가 바로 뒤돌아 서 있는 이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고, 따뜻하게 안아준 뒤, 떠나보내 주는 것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즉 어린 시절 상처받은 나에 대해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내가 삶에 힘을 가지고 진짜 '은아'로서의 삶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황소고집보다 더하다고 했다. 그러나 고집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단단한 힘이 있다는 것의 반증이고 말씀하시며, 선생님 역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함께 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감사했다.) 


그래, 나도 언젠가 상담의 종착역에 가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언제까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만 머무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그린 아이를 마주하는 일을 최대한으로 미루어 둘 것이다. 아직 나는 울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쯤 마음 놓고 '울어도 괜찮아'를 말하며 울어야 할 때 울고, 웃어야 할 때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단단한 나, 진짜 나로 살고 싶다는 열망이 어제보다 오늘 더 강해지는 날. 나는 '마음껏 울어도 괜찮아'라고 멋있게 말하며 기쁘게 울 것이다. 그리고 어린 나를 마주하고, 손 잡아주고, 안아줘야지.


일단 만났으니 인사는 건네보련다. 

안녕?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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