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니나 Sep 06. 2021

숙박비를 내지 않는 방


쥐스틴과 얀은 나를 카르카손(Carcassonne)에 내려 주었다. 유명한 중세 도시라서인지 관광객들이 무척 많았다. 다음 여정은 독일 뉘른베르크(Nuremberg)에 있는 친구 오르페를 보러 가는 것이었지만, 만나기로 약속한 날까지 아직 며칠의 시간이 남은 데다 프랑스에서 독일로 이동하는 동안 지출할 숙박비가 없었다. 프랑스의 대도시 리옹(Lyon)스트라스부르(Strasbourg)를 거쳐 독일로 이동하면서 카우치서핑(*)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 카우치서핑(Couchsurfing): 현지인 집에 남는 소파(Couch)나 침대에 머물며 무료로 숙박을 해결하는 방식. 현지인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웹사이트를 통해 호스트를 구할 수 있다.   



카르카손에 있는 오래된 성곽은 아주 인기 있는 방문지이나, 맥빠진 육신에게는 건조하게 다가왔다.

  


도시에 사는 호스트들에게 일일이 메시지를 보냈으나, 열에 아홉은 거절의 답신을 보내왔다. 아무리 카우치서핑을 시도해 보겠노라 단단히 결심한들, 이처럼 거절만 당하고서야 시작이라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핸드폰을 붙들고 앉아 메시지를 보내다가 리옹행 야간버스를 예매했다. 당장 잘 곳이 없다는 데 대한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으나, 그와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겪으니 이젠 두렵지도 않았다.    

 


‘뭐, 죽기밖에 더하겠어!’     



어둠 속에 서서 리옹행 야간버스를 기다렸다.



야간버스를 기다리며 주변을 거니는데, 사람들이 유달리 말을 많이 걸어왔다. 걷고 있는 나를 불러 세워 ‘오늘 잘 곳이 있는지’, ‘내 상태가 괜찮은지’ 걱정하질 않나, 심지어 어떤 이는 운전하던 차까지 멈춰 세우고선 자꾸만 “괜찮냐”고 물었다. 늦은 시간에 거리를 서성이는 소녀가, 몸집의 절반이 넘는 배낭까지 메고 있으니 걱정이 되었나 보다. 한편 수상한 기색을 띤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내 옆에 문득 한 프랑스인 남성이 앉아 말을 걸기 시작했다. 매력적이라며,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집에 가자고 졸라대 언짢아졌지만, 종종 있는 일이라 놀라지도 않고 거절해 보냈다.    


 

프랑스 리옹(Lyon)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강이 인상적이다.



카르카손에서 버스로 일곱 시간을 달려 리옹 도착했다. 비좁은 좌석에서 어기적거리며  번이나 자다 깼다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역에서 맨몸으로 숙박 장소를 구해야 한다는 걱정 때문인지 내심 리옹 도착하지 않기를 바랐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없이 호스트를 물색했다.  명에게서 집에 와도 된다는 승낙을 받아냈고, 이미 수십 명의 외국인 여행자를 집에서 재운 경력이 있는 세바스티앙을   번째 카우치서핑 호스트로 결정했다.     



나의 카우치서핑 계정. 내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할 수 있는 다양한 항목이 있다. 호스트는 내가 쓴 글을 살펴본 후 초대 여부를 결정한다.

 


(*) 카우치서핑 웹사이트는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신분증과 집 주소, 전화번호 등을 활용해 사용자의 신원을 인증하고 있으며, 연결된 호스트와 여행자는 숙박이 끝난 뒤 서로에 대한 평가를 남긴다. 나 역시 호스트에 대한 다른 여행자들의 평가를 꼼꼼히 읽은 뒤에, 안심할 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서는 경우에만 메시지를 보냈다.


(*) 카우치서핑 호스트들이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잘 곳을 제공하는 것에 의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는 카우치서핑이 ‘교환’에 기반을 둔 플랫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카우치서핑의 호스트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여행자로서 카우치서핑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로, 모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호스트가 되어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비슷한 처지의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되돌려 준다. 그렇지 않은 경우, 세계여행을 하고는 싶으나 여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여행을 직접 떠나는 대신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을 집으로 들여 간접적으로나마 여행의 느낌을 간직하기 위해 호스트를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카우치서핑을 통해 세바스티앙과 주고받은 메시지. 요청, 승낙, 주소 및 연락처 교환, 약속 시간 결정 등의 과정이 담겨 있다.



저예산 여행자들이 카우치서핑을 자주 이용한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혈혈단신으로 나서려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낯선 이의 집에 아무런 대가 없이 머문다는 건 생전 해보지 않은 경험이었다.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지 않은 채로, 첫 번째 호스트인 세바스티앙이 보내준 주소로 찾아갔다.



세바스티앙이 내게 내어 준 방



친절하게 나를 맞이해 준 세바스티앙은 중년의 프랑스인 남성이었고,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프랑스인 여성과 함께 아파트를 공유하고 있었다(프랑스에서는 연인 관계가 아닌 남녀가 아파트를 공유하며 서로 다른 방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미 많은 여행자를 집으로 들인 경험이 있어서인지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그는 내게 침대로 쓸 수 있는 깨끗한 소파뿐만 아니라 방 한 칸을 통째로 내주었다.     



리옹의 풍경



세바스티앙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리옹의 지도를 건네주며 어떤 루트로 산책하면 좋은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론 강벨꾸르 광장, 손 강을 지나 구도심까지 이어지는 산책로, 푸르비에르 대성당. 미래에 대한 걱정이 눈 앞을 가리고 있어서인지 리옹을 앞에 두고서도 무미건조한 인상밖엔 느껴지지 않았다. 강 근처에서 일렁이는 초록빛 물결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조용히 머물러 쉴 수 있는 바위를 발견했고, 한참동안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한가롭게 걸어 보는지…….’


     

오랜만에 누리는 휴식이었다. 사막과 산, 농장, 때로는 길거리를 전전하다가 좋은 집에서 푹 쉬며 도시를 산책하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며칠 또는 몇 주 간격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다 보니 현실 감각마저 떨어진 느낌이었다. 한편, 몸은 편했으나 무언가 결핍돼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걷거나, 산을 오르거나, 일하는 것과 같이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해 오다가 갑자기 정적인 상황에 놓이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름다운 도시에 있음에도 웬일인지 기분이 울적하고 영 신이 나지 않았다.

     

세바스티앙과 함께 구도심을 산책하며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셔벗을 먹었다. 서로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호구 조사에 그칠 뿐인 대화가 이어졌으나, 그러한 대화라도 나눌 수 있는 이가 곁에 있다는 데 감사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함께 영화를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떠날 시간이 다가왔는데, 돌연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많이 오니 걸어가지 말고 트램을 타.”


     

세바스티앙은 걸어가도 괜찮다며 씩씩하게 웃어 보이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트램 승차권을 손에 쥐여 주었다. 기꺼이 이방인의 여행을 돕겠다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나의 첫 번째 카우치서핑 호스트가 되어 준 그는 리옹에서의 짧은 체류를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겨 주었다.



세바스티앙이 준 트램 티켓

    


리옹에서 지냈던 짧은 기간에 나는 지금껏 맞닥뜨린 적이 없던 권태를 정면에서 만났다. 처음 보는 풍경들, 새로 겪는 경험들 하나하나에 찬사를 아끼지 않던 내가 돌연 그 어떤 것에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그토록 방문하길 원했던 리옹에서 무미(無味)에 빠져 허우적댄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껏 즐기고도 남을 만한 상황에서 어떠한 이유로 눅눅한 기분에 젖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한 것일까? 카우치서핑을 하며 돈 없이 전전하는 상황도 먼 훗날엔 그리움으로 남게 되리란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몸과 머리는 따로 놀았다.



트램을 기다리며. 다음 여정은 어디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비어 있는 먹이통을 향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