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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니나 Sep 12. 2021

조건 없는 환대

 

프랑스 리옹Lyon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향했다. 이곳에서 3일 밤을 머문 뒤 바로 독일 뉘른베르크Nuremberg로 넘어가 절친한 친구를 만날 생각이었다. 숙박비를 줄이기 위해 늘 야간에 이동하는 버스를 탔으나, 당연하게도 이와 같은 숙박 방식으로는 피곤이 풀리지 않았다.


아침 일찍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곧바로 카우치서핑(*) 호스트를 구하기 시작했다. 막막하기만 했던 첫 시도와는 달리, 이제 많은 양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알리스Alice라는 이름을 가진 대학생이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일정상 하룻밤밖에 소파를 제공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으나, 다음 날에 또 다른 호스트를 구하면 될 터이기에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하루하루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을 보내고, 어딘가에서 무사히 밤을 지새우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일과 모레에는 어디에서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밤은 무사히 보낼 수 있어!’   



(*) 카우치서핑(Couchsurfing): 현지인 집에 남는 소파(Couch)나 침대에 머물며 무료로 숙박을 해결하는 방식. 현지인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웹사이트를 통해 호스트를 구할 수 있다. (이전 화 '숙박비를 내지 않는 방' 참고)

 

 

알리스와 주고받은 메시지



- 오늘 저녁은 당연히 돼. 침낭 가지고 있어? 몇 시쯤 올 생각이야? 우리랑 같이 저녁 먹을까? (나는 남자친구 그리고 한 명의 룸메이트랑 같이 살고 있어.) Bien sûr tu peux venir ce soir. Tu as un sac de couchage? Tu penses venir vers quelle heure? Tu peux manger avec nous? (J’habite avec mon copain et une colocataire.)


- 연어 크로크무슈 준비할 건데, 뭔지 알아? 이거 좋아해? Je vais faire des croques monsieur au saumon, tu sais ce que c’est? Tu aimes ça?  

  


독일과 맞닿아 있는 국경 도시인 스트라스부르에서는 독일어의 느낌을 강하게 띠는 문자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리옹도 무척 아름다웠지만,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절로 탄성이 나왔다. 동화책 삽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집들 사이로 짙푸른 물결이 일렁이고, 온통 꽃이 만발했다. 알리스의 집으로 향하는 도중 디저트로 함께 먹을 에끌레어를 샀다.





긴장된 마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서니 알리스와 그녀의 연인이 벌써 저녁상을 다 차려 놓고선 반가이 맞아 주었다. 만 20세의 대학생 커플로 알리스는 화학, 남자친구는 체육 전공자였다. 그들이 준비한 음식은 토마토를 곁들인 맛좋은 연어 샌드위치. 내가 사 온 디저트까지 즐겁게 해치운 뒤 셋이 나란히 앉아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5’를 보았다. 더빙된 프랑스어는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내용도 썩 흥미진진하지 않았지만, 낯선 외국인 여행자를 집에 받아들여 기꺼이 시간을 공유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연신 고마움의 마음을 표하니, 알리스는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답했다.


영화를 본 뒤에는 거실에 놓인 소파에서 마음 놓고 잤다. 침대로 변형할 수 있는 소파였는데 무척 쾌적했다. 야간버스에서 누적된 피로가 풀려서인지 행복감을 느낄 정도로 개운하게 깨어났다.



- 어제 저녁에 머물게 해줘서 고마워. 너와  남친이 하는 모든 일이  풀리길 바랄게. 좋은 하루 보내! Merci de m’avoir acceptée hier soir. J’espère que tout ira bien pour toi et ton chéri, Alice. Bonne journée, alors !

- 천만에,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일인걸! 고마워. 너도 좋은 하루 보내. De rien, c’est normal! Merci beaucoup. Bonne journée à toi aussi.



스트라스부르의 공원



알리스의 집을 나선 뒤에도 내겐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일정이 이틀이나 더 남아 있었고, 곧바로 다른 호스트를 구해야 했다. 전날과 다름없이 역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충전하며 호스트를 찾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는 건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했다. 그날 안에 승낙의 메시지를 받지 못하면 세 번째 노숙을 감행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지던 중, 핸드폰 화면에 클로드Claude의 메시지가 떴다.    




클로드와 주고받은 메시지



- 미안해, 어제 내 사촌이 이사하는 것을 돕느라 메일함을 전혀 보지 못했어. (…)  넌 오늘 저녁 그리고 내일까지도 우리 집에 머무를 수 있어. (그런데 내일 저녁에 친구들이 날 초대했거든, 네가 함께 갈 수 있는지 알아볼게.) Désolé, je vois pas que je réponds un peu tard mais j’ai aidé mon cousin à déménager hier, et je n’ai pas du tout regardé mes mails. (…) Je pense que je peux te loger ce soir et/ou demain (mais demain soir je suis invité chez des amis, faudrait que je vois si tu peux venir avec).     


- 내 룸메이트가 말하길, 친구들이 모임을 여는데 너도 와도 된대. 근데 걔네들이 다 담배를 피워... 넌 어때, 괜찮겠어? Ma coloc m’a dit qu’ils nous ont invité a un apéro et tu es la bienvenue, par contre ils fument tous... ça t’irait?

- 당연하지, 나도 갈래! 걱정하지 마, 나도 때때로 담배를 피거든. 그럼 좀 이따 보자! Mais oui, très volontiers! Pas de problème, je fume quelquefois aussi. À plus tard, alors!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에서 선물처럼 다가온 메시지를 읽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바로 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클로드는 주소를 알려 주었다. 낯선 이의 집에 찾아가는 것도 그 횟수가 세 번째에 이르게 되니 익숙해졌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로운 사람들을 맞는 게 일상이 되다 보니 상대방을 편하게 해줄 수 있도록 밝은 기운을 표출하는 게 쉬워졌다. 마침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클로드에게 “안녕Bonjour!”하며 살갑게 인사했더니, 그가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밝은 밤색의 머리칼을 짧게 깎은 그는 앙다문 듯한 입모양으로 인해 다소 고집스러운 인물일 것이라는 인상을 풍겼으나, 막상 대화를 시작하니 눈꼬리를 휘면서 활짝 웃는 게 무척 호감형이었다.


그가 준비한 토마토 파스타를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감동이 치밀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하마터면 노숙하게 될 판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이토록 아담한 집에 앉아 프랑스인 친구와 대화하고 있다니. 500원짜리 빵으로 허기를 채우다가 돌연 누군가가 만들어준 따뜻한 파스타가 앞에 놓이면, 감격스러운 마음에 되레 멀뚱멀뚱 앉아있게 된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클로드는 집 구석구석을 소개하더니 응접실에 있는 소파를 넓게 펼쳐 쾌적한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클로드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말했듯이, 친구가 나를 아페로(Apéro, 가볍게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모임)에 초대했어. 너도 같이 간다면 환영이야!”


“물론이지! 나도 갈래.”     



클로드 친구네 집으로 향하기 전, 와인을 사기 위해 근처 대형마트에 들렀다.



클로드와 함께 와인을 사들고선 초대받은 집으로 걸어가는데, 좀처럼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을 이때만큼 절절히 느낀 적도 없었다. 클로드는 프랑스 각 지역의 사투리를 기가 막히게 흉내 냈고, 나는 그의 모습과 말투가 무척 재미있어 목청을 높여 웃었다. 내 반응에 신이 난 클로드는 멈추지 않고 익살스러운 행동을 이어 갔다.


아담한 집에 발을 들이니, 프랑스인 세 명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자리가 막 시작된 모양인지 각 사람 앞에 빈 잔이 놓여 있었고, 큼지막한 LP에서는 고전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친구들이 스스럼없이 맞아 준 덕분인지 별다른 어색함을 느끼지 않은 채 자연스레 합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클로드더러 내게 꼭 스트라스부르를 구경시켜 주어야 한다고 당부했고, 클로드는 “당연하다”며 안 그래도 뭘 먹으러 갈지 고민 중이라고 답했다. 친구들은 편안히 앉아 근래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거나 내 이야기를 경청했는데, 매사 친밀하고 다정한 기색으로 일관했다. 한 친구는 회사에서 업무를 보며 생기는 고충을 꺼내 놓았다.     



“이곳 스트라스부르가 위치한 알자스Alsace 지방은 독일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선지 어느 회사건 독일어 실력을 요구해. 내가 일하는 곳의 컴퓨터들도 다 독일어로 설정돼 있어서 어려워.”


“맞아, 스트라스부르에선 어딜 가도 그래.”     



지리상의 특성 때문인지 알자스 지방은 한때 독일의 지배를 받기도 하는 등 오래전부터 독일과 밀접한 관계에 놓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타 프랑스 지역보다 독일에 가는 게 훨씬 쉬울 정도로 독일과 밀착돼있는 지역이기에, 상당수의 주민이 독일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했다. 한때는 ‘알자스어’라 불리는 지역 토착어가 쓰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춘 탓에 스트라스부르 토착민인 클로드와 친구들에게도 생소한 언어가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알자스어를 공유하며 킥킥대던 친구들은 텔레비전을 유튜브와 연결했고 한국어로 된 노래를 틀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멜로디였기에 언어를 바꿔 가며 틀어도 모두가 즐길 수 있었다. 잔을 기울이며 이따금 담배를 물고 은은하게 흐르는 LP의 음악에 몸을 맡기다 보니, 금세 클로드의 친구들과 친밀해져 작별이 아쉬워질 지경에 이르렀다.




스트라스부르의 풍경



다음날 클로드는 내게 스트라스부르 곳곳을 걸어서 구경시켜 주었다. 꽃이 만발한 다리, 시원스레 흐르는 강물과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집들, 유럽연합 의회, 알자스 지방의 전통 가옥들이 모여 있는 쁘띠뜨 프랑스Petite France 구역. 어깨가 빠지도록 무거운 가방은 잠시 내려두고, 친절한 친구가 안내하는 마을을 두루 둘러보는 일은 미처 예기치 못했던 기쁨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클로드는 잘 아는 집이 있다며 나를 이끌었다. 여행 예산이 그리 넉넉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기분 좋게 외식비를 지출해야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그를 따라 걸었다. 도착한 식당의 주력 메뉴는 ‘플람므쿠슈Flammekueches’라는 이름을 가진 알자스 전통 음식으로, 피자처럼 넓적한 도우에 치즈나 햄 등 원하는 토핑을 올려 구워낸 요리였다. 다만 피자처럼 오븐에 굽는 게 아니라 팬에 구워낸다고 했다. 생맥주를 앞에 놓고선 각자 두 판씩 거뜬히 해치운 뒤 만족스러운 배를 두드리는데, 그새 볼은 상기되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커져 버렸다. 식사비를 치르기 위해 지갑을 뒤적이자, 클로드가 본인이 계산하겠다며 강하게 만류했다.      



“이건 내가 사는 거야.”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만류하는 그의 말에 잠시간 고민하다, 이내 클로드에게 감사를 표했다. 클로드가 식사비를 지불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기에 놀랍기만 했다. 그 역시 한때 카우치서핑을 이용해 동남아 등지를 여행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내가 처한 상황에 깊게 공감하는 것처럼 보였다.



클로드와 함께 먹은 알자스 전통 음식, 플람므쿠슈.



다음날 예매해둔 독일행 버스는 새벽 4시 5분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새벽 세 시쯤 부랴부랴 일어났는데, 클로드 역시 세 시에 알람을 맞춰 놓고 일어나더니 무심한 투로 말을 건넸다.   

  


“5분만 데려다줄게.”      



그러나 클로드는 5분이 지나도 돌아가지 않았고, 결국 버스 터미널까지 걸어서 데려다준 다음에야 작별 인사를 건넸다. 부족한 여행 경비로 인해 재정적·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돌연 진심 어린 환대를 받게 되어 얼떨떨한 한편, 그동안의 여행에서 맞닥뜨렸던 괴로움마저 모조리 상쇄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무는 동안 열과 성을 다해 챙겨준 것도 모자라 떠나기 직전까지 살뜰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그를 보며 다짐했다. 나 역시 클로드를 본받아,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를 베풀겠다고. 



클로드의 집을 떠나기 전, 몰래 두고 온 편지 / 클로드가 내 카우치서핑 계정에 남긴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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