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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니나 Feb 12. 2024

나는 능력에 합당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가

행복의 비결 - 장 자크 루소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두 명의 직장인이 있다. 다음 상황에서 A와 B가 보이는 태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상황 1. A는 자신이 목표로 했던 곳에 입사하여 만족스러운 급여를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쌓게 된 역량을 마음껏 발휘한다. 자신이 지닌 능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상태로 살아간다.


상황 2. B는 현재 받고 있는 급여가 만족스럽지 않지만, 당장 이직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마지못해 회사를 다니고 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볼까 싶다가도, 어렵게 쌓아 올린 커리어마저 잃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추진하지 못한다. 실력을 향상시킬 의지는 없지만, 그럼에도 늘 더 나은 조건을 갖추길 바라며 살아간다.


상황 1의 직장인 A는 자신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상태"로 살아가고, 상황 2의 직장인 B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해 "늘 더 나은 조건을 갖추길 바라며" 살아간다. 굳이 철학적 관점을 도입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A를 B보다 행복한 사람, B를 A보다 불행한 사람으로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왜 A가 B보다 행복해 보이는가? B보다 재정적인 여건이 나아서? (—그러나 A가 B보다 급여를 더 많이 받는지는 알 수 없다.) 새로운 분야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어쩌면 B에게도 같은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시된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A는 자신이 받는 급여에 만족하고 자신감도 넘치기 때문에 더 나은 조건을 바라며 살지 않지만, B는 급여를 포함한 삶의 여건 전반에 만족하지 못해 언제나 다른 조건을 바라며 살아간다. A와 B의 차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A는 능력이 욕망을 능가하는 사람, B는 욕망이 능력을 능가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 Jacque Rousseau, 1712~1776)는 1762년에 출판된 『에밀』 제2부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자문한다. 그는 불행을 "욕망과 능력 간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욕망과 능력 간의 평형을 유지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욕망이 능력을 능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설령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더라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능력이 감당할 수 없는 욕망에 빠진다면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황 1과 2에서 직장인 A와 B 중 어떤 사람이 더 높은 급여를 받는지, 어떤 사람의 능력이 더 뛰어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A는 능력이 감당할 수 있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반면 B는 능력이 감당하지 못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욕망과 능력, 즉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평형을 통해 실현된다는 관점을 채택한다면 A는 행복한 사람, B는 불행한 사람이다.


출처: CasaYoga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능력과 욕망이 평형을 유지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능력과 욕망이 불균형 상태에 있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시도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여진다.


1. 능력을 욕망의 수준으로 올린다.

2. 욕망을 능력의 수준으로 낮춘다.


1번은 욕망을 실현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는 반면, 2번은 과도한 욕망을 현재의 능력에 적합한 수준으로 낮추는 데 집중한다. 언뜻 보면 둘 다 괜찮은 방법으로 보이지만, 『에밀』에는 1번과 같은 시도가 불행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심장한 대목이 존재한다.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은 능력과 욕망 간의 차이가 적어져 행복에 가까워진다. 현실세계에는 한계가 있으나 상상의 세계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현실세계와 상상세계의 조화를 위해서는 상상의 세계를 제한해야 한다. 행복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으며 불행은 상상에 달려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논리지만 적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실천이 문제가 된다. (루소, 『에밀』)



자신이 지닌 욕망의 수준에 맞게 능력을 끌어올리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원하는 걸 이뤄낼 수 있을 정도로 능력치를 올리겠다는 것이니, 건설적이고 진취적인 목표를 세웠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인간이 상상력이라는 지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게다가 상상의 세계에는 한계가 없다. 자신이 원하는 수준으로 능력을 끌어올려 특정한 유형의 욕망을 달성한다면, 그 사람은 곧바로 행복해질까? 어쩌면, 아니 필연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욕망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낮은 수준의 쾌락에 만족하더라도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쾌락을 갈망하게 되면서 고통을 겪게 된다는 "쾌락의 역설"을 연상해 보아도 좋겠다. 인간에게서 상상력을 빼앗지 못하는 이상 욕망의 수준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능력을 욕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시도는 결국 스스로 행복을 누릴 권리를 박탈하는 데 이를지도 모른다.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인간의 지혜란 능력이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은 줄이고 능력과 욕망을 완전히 대등한 상태로 놓는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힘은 활동상태에 들어가고 마음은 안정을 얻은 조화로운 상태에서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은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 (루소, 『에밀』)



그럼 우리에게 남은 방법은 2번, 욕망을 능력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다. 달리 말해 내가 지닌 능력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면서, 능력 범위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에는 애초부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계발하지 않고 현재 처한 상황에 수동적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의미보다는, 과도한 욕망을 내려놓고 내가 지닌 능력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루소에게 있어 행복은 단순히 미덕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세기, 즉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능력과 욕망을 일치시킬 수 있는 사람은 강자,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약자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능력과 욕망 간의 평형을 달성하려는 시도로 점철되어 있으며, 인간은 자신의 현재 상태에 만족하는 순간 가장 강한 사람이 된다.


현재 발휘할 수 있는 능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에게 없는 능력만을 바라는 사람은, 즉 능력과 욕망 간의 평형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약자라고도 볼 수 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치타가 하늘을 나는 새를 부러워한다면 어떤가? 자신이 충분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를 발휘하지 않고 남이 가진 또는 나에게 없는 능력만을 바라는 사람은, 뛰어난 달리기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이 날 수 없다는 이유로 새를 부러워하는 치타나 다름없다. 결국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조건에 대해 한탄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대신, 능력 범위의 중심에 머무르며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으며 진정한 강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과연 나는 능력에 합당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능력이 욕망을 능가하는 경우에는 곤충이나 벌레도 강자가 된다. 그러나 욕망이 능력을 능가할 때는 신일지라도 약자가 된다. 인간이 현재 위치에 만족하면 강자가 되지만, 그 이상이 되려고 하면 약자가 된다. 마치 거미가 거미줄의 중심에 머물러 있듯이 우리도 우리의 능력범위의 중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자신에게 만족하고 자신의 약함을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루소, 『에밀』)



인용문 출처 : 『에밀』, 장 자크 루소 지음, 정영하 옮김, 연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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