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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mini Feb 05. 2021

결혼은 못(안)했지만 불효녀는 아니야

서른 찬가

더워지고 있다, 애리조나가.

해가 길어지고 또 무더워지고 있다.

요즘 매일 골프 연습장에 가는데 사람들의 옷이 점점 가벼워지고 짧아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뜨겁기로 유명한 애리조나에 다시 여름이 오고 있음을.


바로 그 애리조나다.

최근 "놀면 뭐하니"라는 프로그램에서 유재석 님의 부캐 "카놀라 유"의 고향이라는 애리조나.

촌구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애리조나를, 최근 한국에서 가장 핫한 프로그램에서 언급해주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애리조나"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개 끼는 샌프란시스코를 집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사실 이젠 나도 내 거처가 어디인지 헷갈린다.

나의 직장이 있는 샌프란시스코, 지난 몇 년은 거기에 쭉 살았고 지금은 잠시 코로나 때문에 본가가 있는 덥디 더운 애리조나에 와있지만 다시 복직을 할 예정이니 샌프란시스코를 집이라고 일컬어야 하나.


어렸을 때 미국에 이민을 와서 처음으로 터를 잡았던 곳은 캘리포니아의 얼바인이었다.

온갖 아시안 문화가 짬뽕이 되어있는 그곳에서 말괄량이 고등학생 시절을 보내고 그러고도 일 년을 더 있다가 애리조나 피닉스라는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잊을 수가 없다, 이삿짐을 한 트럭을 보내고도 우리 승용차 한 가득 이삿짐을 더 실어 이사오던 날.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얼바인과는 너무도 다른, 낯선 풍경들을 지나쳐오며 어리둥절하고도 들뜬 마음으로 피닉스 집에 처음 입주하던 날.

물론 얼바인에 살 때도 피닉스는 두어 번 정도와 봤던 터라 이곳이 정말 "우리가 아는 그런 사막"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곳에 이사를 오던 날엔 '나 앞으로 이렇게 메마른 땅에서 뭐하고 살지, 열라 심심하겠다'라는 생각만 들었다.


얼바인에서는 집 밖에만 나가면 할 것 투성이었다.

전화 한 통이면 달려 나올 친구들도 있었다.

내 미국에서의 추억들은 그곳에 다 머물고 있었다.

맛집들도, 쇼핑센터도, 힙한 스트릿 몰도 다 내 손바닥 안에 있었다.

15-20분만 달려가면 내가 사랑하는 Laguna Beach도 있었다.

심심할 틈이 어디 있겠나.

내가 사는 곳이어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도시였다, 얼바인은.


그러다가 피닉스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나에겐 필수적인 바다도 없고 푸르른 숲은커녕 앙상하고 메마른 나무 투성이인 등산로는 어쩔 것이며, 집 밖을 나서면 걸어 다니는 개미 한 마리 조차 찾아볼 수 없고 숨이 턱 막힐 만큼 더운 이곳을 꽤 오랜 시간 미워했다.

친해지기까지 정들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주 끔찍했으니 말 다했지.


모두 아시다시피 나는 작년 10월부로 승무원 직으로부터 강제 휴직을 당했다.

코로나로 인해 비행 편수, 승객수가 현저히 줄었고 그로 인해 항공사의 적자운영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갖은 노력 끝에 우리 회사가 마지막 방편으로 결정한 "강제 휴직", 그 희생 인원 중 한 명이 되었다.

물론 처음엔 그저 막막하기만 했지만 그놈의 강제 휴직 덕분에 하고 싶었던 거 다 해보는 진귀한 시간을 보냈다.

그중 하나가 한국에 가서 베이킹 클래스를 듣는 것이었다.

자가격리 기간을 포함해 한 달 반이라는 긴긴 시간을 한국에 있었다 (비행을 해야 했다면 절대로 낼 수 없는 긴 기간이다.)

그래서 휴직을 당한 후의 심리 상태는 나쁠 틈이 없었다.

우울할 틈도 안 주고 한국으로 날라 버렸으니까.

그렇게 한 달 반은 잽싸고 재밌게 흘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는 왔는데.. 샌프란시스코가 베이스였으므로 쭉 그곳에 머무르다가 휴직을 당하니 그곳에 머물 이유가 전무해진 거다.

적도 없고, 일도 없는 그곳에 "애리조나 본가로 돌아가기 싫다"라는 이유로 머물기엔 샌프란시스코는 너무 비싼 도시였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부모님이 계시는 피닉스 본가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몇 년 만에.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피닉스 이곳으로 말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그대로인데 달라진 것은 딱 하나였다.

내가 서른이 되었다는 사실.


승무원 트레이닝으로 떠날 당시 내 나이는 아마 스물네다섯쯤이었다.

응당 집에서 떠나야 할 나이라고 생각했다.

불과 6년 전, 그때의 나는 엄마 아빠의 흰머리보다는 나의 미래에 대한 설계에 마음을 더 쏟았다.

뭘 해도 눈이 반짝이던 시기였다.

최대한 멀리멀리 날아가고 싶었다.

우물 안 개구리 같았던 애리조나에서의 나는 벗어던지고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직업 덕분에 감사하게도 실제로도 그리 이루어졌다.

2015년부터 코로나가 심해지기 직전까지 나는 넓디넓은 세상을 경험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있었나' 아득하기만 한데, 승무원이었던 내가 먼 과거처럼 낯설기만 한데..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참 많이도 다녔다, 겁도 없이.

세상 조그마한 내가 이 나라 저 나라 휘젓고 다녔으니 그 나날들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귀하다.


크루, 승객을 다 합쳐 족히 수만 명은 만났을 지난 몇 년.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값진 인생 수업을 나는 그 무수한 사람들을 통해 배웠다.

불쾌했건 유쾌했건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의 내가 되는 데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연애도 했겠지, 많이 많이 했겠지.

내가 지금의 내가 되는 데에는 사실 그 연애들이 가장 큰 역할을 했겠지.

재미도 좀 봤고 진짜 사랑도 해보고 누군가와는 결혼도 꿈꿨겠지.

가장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직업 가운데 안정감을 실현하기 위해 서른 전에는 꼭 가정을 꾸리리라 다짐도 해봤으리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야 할 이유가 없도록, 그곳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집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심보도 있었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불안했을 엄마 아빠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고 싶었던 다급함이 늘 내 안에 자리하고 있기도 했다.


예전에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비행을 하는데 내가 너무 좋아하는 선배님이 "제니야, 헤어져서 슬픈 건 알지만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걸 주춤하지 마. 너도 알다시피 이 직업이 혼자 뭐든 다 해내려고 하는 습성을 갖게 하는 직업이라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뭐든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해지거든. 그럼 누굴 만나기가 힘들어져"라고 충고해주셨고 그 말을 받들어 참 열심히도 연애를 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참 열심히 인생의 동반자를 찾아 헤맸다.


"네가 혼자여도 괜찮은 아이였다면 걱정하지 않았을 거야, 근데 넌 아니잖아. 넌 늘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어 하는 아이잖아. 그래서 엄마는 알아,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게 네게 얼마나 중요한지"

라고 말하는 엄마의 말에


"엄마. 나 결혼 안 해도 되거든? 나 엄마 아빠랑 평생 살아도 좋거든? 그니까 나한테 결혼 얘기하지 말아 줘"

라고 되받아치긴 했어도 평생 혼자로 엄마 아빠와 부대끼며 사는 건 참 몹쓸 짓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아니, 것보다 엄마가 앞서 짚어낸 그 관찰이 너무도 정확해서 사실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다.

'아 쒸, 그래. 나도 빨리 결혼하고 싶어. 나도 서른에는 결혼도 하고 애는 한세 살쯤 돼있을 줄 알았지'라는 생각을 엄마는 아마 정확히 읽었던 것 같다.

엄마 아빠도 내가 서른 즈음엔 참 괜찮은 사람과 결혼해서 멀리멀리서 살고 있을 줄 알았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기대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내 20대 끝자락의 머릿속엔 온통 결혼, 결혼, 결혼뿐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생각의 반대편으로 도망쳐야 하는데 나는 답도 안 나오는 그 생각을 향해서 내달렸다.

서른이 되는 게 무서웠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여자 나이는 앞자리가 바뀜과 동시에 힘들어진다"라는 악담에 귀 얇은 나는 쉽사리 흔들리기 일쑤였다.

찌르면 꿈틀대는 지렁이처럼 자주 예민했고 자주 발끈했고 자주 우울했다.


그러다가 진짜 서른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미혼이다.

비혼은 아니다.

그저 결혼을 "못" 혹은 "안" 한 것일 뿐.


벌벌 떨던 그 나이, 서른.

그 나이에 나는 다시 엄마 아빠 집에 들어와 살고 있다.

서른이 되도록 독립하지 못한 자들을 미국에선 루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 내가 바로 그 루저라면 루저겠지?


"너 하나쯤은 먹여 살리는 건 일도 아니야, 걱정하지 말고 들어와"라고 말해주는 엄마 아빠의 집에 다시 기어들어와 살면서 눈치 하나도 안 보며 살고 있다.

나아가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매일이 즐겁기까지 하다.

(솔직하게 말해봐, 엄마 아빠도 요즘 딸 가진 재미 쏠쏠할 걸? 엄청 재밌어서 내 결혼이고 뭐고 생각 안 나지?)

그래서 웃기게도 그 긴긴 시간 정들지 못하던 애리조나에 정이 들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엄마 아빠가 있는 이 피닉스에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서른에 코로나로 타격 입은 가장 큰 업계에 몸 담고 있는 불안정한 승무원인 딸이라,

서른에 아직 미혼인 딸이라,

서른에 여전히 집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딸이라

조금 유감이긴 해도

미안하진 않다.


솔직히 서른, 겁나 기대되고

나는 여전히 좋은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독립해서 출가한 남동생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두배로 노력하고 있는

올바른 길 위에 서 있는 딸이기도 하니까.

이런 나라도 자랑스럽다고, 믿는다고 말해주는 엄마 아빠의 딸이니까.


그래, 엄마 아빠 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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