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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mini Nov 17. 2020

반려동물과의 이별을 상상해본 적 있나요

세모야, 우리 곁에 10년은 더 있어줘

기억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집엔 항상 강아지가 있었다.


사람이 아닌 작은 생명체가 꼼지락 거리는 걸 "혐오"까지 하던 엄마와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와 함께 자라 온 아빠,

그 둘의 싸움에서 승자는 늘 아빠였고 그래서 우리 가족은 늘 강아지와 함께였다.


할머니 댁이 있던 사당동에서도, 분당 집에서도, 서울공항 앞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았을 때도.

다시 분당에 와서도,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도.


우리가 한국에 살 땐 아빠의 친한 친구 중 한 분이 수의사였던 까닭에 늘 가장 예쁘고 비싼 새끼 강아지를 분양받곤 했다.

꾹 눌러놓은 찐빵같이 생긴 시츄들 중에서도 순종만 골라서 분양받았었는데, 분양받은 꼬물이인 아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채로 발견된 적도 있었고.. 다른 강아지들은 대부분의 경우 다른 집으로 파양을 보냈었다.


(비겁한 핑계겠지만)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사실 잘 기억나진 않는다.


오직 기억나는 건 전원주택에 살 때 밖에 묶어두고 키웠던 골든 리트리버 "골디"가 순하디 순해서 내 동생이 아가였을 때 골디 등에 태워 우리 집 정원을 몇 바퀴 돌던 것, 그리고 여름에도 겨울에도 우린 골디를 밖에 묶어놓고 키웠었다는 거 (미국에 살다 보니 강아지를 밖에 묶어두고 키우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를 깨닫는다. 미국에서는 그런 행위를 학대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리고 중학생 때 미국으로 이민 오기 직전까지 키웠던 슈나우져가 우리 같은 자격미달인 가족을 만나 천방지축으로 컸고 그래서 다른 집을 전전하다가 우리 이모 지인분께 정착했다는 거.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은 강아지를 키우면 안 되는 가족이었다.


지금에서야 동물들의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정보가 많아져서 동물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대변하며 싸워주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내가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 반려동물 문화는 생각해보면 참으로 미개했다.

유기견 보호소에서의 입양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드문 일이었고 대부분이 작은 유리 박스 안에 갇혀있는 강아지를 그때그때 유행하는 견종에 따라 분양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요즘같이 미디어의 발달에 따라 반려문화의 현주소, 유기동물 보호소의 실태, 무책임한 주인들의 무지함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예쁜 아이를 큰돈을 들여 "분양"씩이나 받아놓고 우리의 구미에 맞춰, 우리의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계속 기를지 말지를 결정했던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때를 생각해보면 낯 부끄러운 감정을 초월하여 가슴이 타들어갈 만큼 통탄스럽다.

또 우리의 무책임함에 선택의 여지없이 낯선 환경으로 던져졌던 아이들에게 그저 미안하고 미안하기만 하다.




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 건 웃기게도 "또" 강아지를 키우게 되면서 였다.


하지만 이번엔 좀 특별했다.


우리에게 이런 감정을 가져다준 이 강아지, "세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얼떨결에 엄마와 나는 유기견 보호소에 구경을 가게 되었다.

엄마가 강아지를 워낙 싫어하니 기니피그를 키우겠다고 빡빡 우기던 나에게 "기니피그를 키울 거면 차라리 강아지를 키워라!"라고 무심코 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런 말을 넘겨 들을 리 없는 내가 그날로 엄마를 모시고 유기견 보호소에 갔고 거기서 작고 꼬물거리는 세모를 만났다.


세모가 있던 철장 안에는 이미 세모를 안고 입양 절차를 밟으려고 하는 백인 아줌마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발걸음을 돌리기엔 세모는 운명처럼 내 눈에 들어왔고 나는 아쉬움에 "엄마.. 쟤 진짜 귀엽다.. 저 아줌마가 입양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계속 나지막이 엄마에게 말했다.


내 간절한 눈빛을 봤는지 그 백인 아줌마는 "너 이 강아지 입양하고 싶니?"라고 물어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yes!"라고 대답했고,

그 아줌마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짧게 통화를 마친 후 "너 이 강아지를 잘 키울 자신 있니?"라고 내게 다시 물었다.

나는 또 "yes!"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래, 우리 집엔 이미 강아지가 여러 마리 있어. 그럼 네가 이 강아지의 좋은 주인이 되어줘"라며 세모를 나에게 양보했다.


그렇게 세모는 우리 집의 가족이 되었다.

잊을 수도 없는 날, 2009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태어난 지 3개월쯤으로 추정되는 아가가 우리 집에 왔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정확한 견종이 뭔지, 어쩌다가 길에서 발견됐는지 알 길 없는 딱한 아가.

여태껏 키워왔던 강아지들과는 달리 부티가 나지도 않고, 털도 제멋대로 나있고, 귀와 꼬리에 삐죽빼죽 질서 없이 난 털을 어떻게 미용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반달곰처럼 까맣고 까맣기만 한 작은 시고르자브종 강아지.


세모가 우리 집에 온 2009년은 우리 가족에겐 살을 에는 듯 찬 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2005년에 호기롭게 시작한 이민생활이 제동 장치도 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때였다.

가족 모두가 힘들었고, 한 사람이라도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넷 모두가 무너질 수도 있는 시기였다.


희한했다.

분명 한국에서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운 삶을 영위했던 때에도 키우던 강아지를 수차례 파양 하기를 반복했던 우리인데, 제 코가 석자인 미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아이를 목숨과 같이 사랑하게 되었을까.

+100이었던 우리의 상황이 지하를 뚫고 내려가 -100이 된 상황에 어떻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명을, 내 새끼도 아닌 동물을 예전보다 더 책임감 있게 돌보게 되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모는 우리가 "생존"하는 데에 급급해서 정작 "사람답게 사는" 일에는 소홀했을 때에 우리에게 삶에서 진짜 중요하고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알려준 존재다.

콕!하고 찌르면 금방이라도 빵! 터져버릴 것처럼 우리 가족의 힘듦이 극에 달했을 때에 아침에 일어나면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만 쳐다보고 있는 (못생겼는데 예쁜) 애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주섬주섬 목줄을 챙겨 규칙적으로 산책을 나감으로써 나도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그 어느 것도 위로가 되지 못했던 그때, 나를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늘 가벼웠다.

따뜻했고 포근했다.

책임감은 덤으로 따라왔다.

우리 가족이 보호소에 있던 세모를 살리기도 했지만.. 세모야말로 우리 가족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게 해 준 구원자였다.

그렇게 우리는 힘든 시기를 능동적으로 이겨냈고 그 과정 과정마다 세모는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터널을 비로소 빠져나와 정신을 차려보니 세모는 어느덧 노견이 되어있다.

내 주변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세모도 나와 함께 나이가 들어가고 있던 거다.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어 대략 12살쯤 됐다고 가늠하고는 있지만 그 누구도 세모가 언제 어디서 누구 밑에서 태어났는지 속 시원히 말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저 발바닥이 폭신하고 분홍색이었을 때부터, 이젠 희끗희끗한 털 때문에 감히 까만 강아지라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하얘진 지금까지.. 우리 가족은 세모를 내 새끼처럼 내 동생처럼 잘 지켜냈다.


인형을 종류 별로 물고 뜯고 다니며 던져달라고 에너지 넘치게 가져오던 그 아가가 이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낸다 (나는 왜 이 문장을 쓰면서 눈물이 날까).

여전히 산책 나가는 걸 가장 좋아하는 해맑은 아이지만 이젠 쉬이 지치고 만다.

사람보다 약 7-8배 빨리 흐르는 강아지들의 시간은 우리가 결코 붙잡아둘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강아지가 나이 든 것처럼 내 주변 친구들의 강아지들 또한 나이 들어있다.

그 아이들을 아주 오랜만에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볼 때마다 나이 들어있어 괜히 찡하다.

남 일 같지 않기에 더욱이.


얼마 전 내 친구의 친구 강아지가 갑자기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날 아침까지만 해도 산책도 하고 아주 잘 놀았는데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 친구는 한동안 매일 울었다고 했다.

너무 슬퍼해서 내 친구가 위로해주러 집에 놀러 가서 그렇게 좋아하는 곱창을 시켜줬는데 먹지도 못하고 울더라는.

슬픔이 정점을 찍는 그래프를 그리고 나서는 슬픔 그래프가 살짝 내려오긴 하는데,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그 슬픔이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다.

밥을 먹고 친구들을 만나고 하하호호 웃기도 하지만 그냥 그 슬픔을 계속 안고 살아가는 거라고.


사실 그 슬픔을 나는 내가 직접 겪기 전까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막연히 두렵긴 하다.

한동안은 이 아이가 날 떠나면 그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매일매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뭐.. 상상하면 슬프고.

그 생각만으로도 내 눈물 버튼이고.


그런데 친구가 그랬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슬퍼할 에너지를, 그 아이를 더 사랑하는 일에 쏟으라고.

친구가 그렇게 말을 해 준 이후에 나는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특별히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세모는 나보다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널 것"이라는 불가피한 인생의 섭리.

피할 수 없는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지금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꼭 세모 일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웃기게도 우리 집에 오는 강아지들은 늘 "세모"였다.

그런데 세모가 떠나고 나면 우린 다음 강아지를 세모라고 부르지 못할 것 같다.


물론 벌써부터 다음 강아지를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다.

세모는 앞으로 10년은 더 살아줄 거니까.

적어도 내 바람은 그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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